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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707

죽을 각오로 명령을 받들다.

by 정썰 Feb 26. 2025

도깨비 부대에서 도깨비 같은 일들을 겪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함께 임관했던 동기들은 우르르 전역을 했고, 수화기를 통해 내 귀에 욕을 때려 박던 선배장교는 뜬금없이 담배를 권했지만 입에 물지 않았고, 적군보다 미웠던 작전장교보다 내가 먼저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중대장 준비를 위해 장성에 자리한 상무대로 고등군사반 교육에 들었다. 잠도 못 자고 끼니도 밥먹듯이 거르며 지낸 1년 후라서 그런지 교육과정은 나름 꿀이었다. 국가의 명령을 받기 전 까진.


총 교육 기간이 몇 개월이었는지 정확하진 않다. 다만 교육이 중반을 넘어설 즈음이었던 거 같다. 중대장으로 야전에 나가야 할 우리는 교육이 끝나는 시점에서 발령을 받는 게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전부터 뭔가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지더니 날벼락이 떨어졌다. 수백 명의 동기생 중 20여 명이 포함된 명단이 명령으로 내려왔고, 그 명단에 내 이름 석자가 있었다. 특.전.사. 흔히 공수부대라고도 했고, 풀네임은 공수특전부대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겉은 반 육사동기를 통해 707(특수임무단) 인사장교가 내 평판을 물어온 거다. 죽으란 소리로 들렸다. 일도 생각지 않았던 특전사 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한데 그중 707이라니. 체력적 상황을 솔직하게 전달하고 깡으로 충만했던 친구를 추천했다. (그 친구는 707에서 군수장교까지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특전사를 피할 길이 없을까 고민했다. 난 특전사에 적합한 자원이 아니었다. 개인에게도 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매칭이었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된 사실. 20여 명의 대상자 명단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특공부대 출신이거나 체육전공자였다. 친한 동기 중에는 내가 전속부관 시절 사단장님께 찍힌 거 아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피해야 했다. 살아야 했다. 그런데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발령 당일로 며칠간 목격한 장면은 실망을 넘어 내 속에 오기를 심어주었다. 교육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복도를 지나다 보면 유독 다급한 모습으로 전화 통화를 하는 동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명단에 오른 자들이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특전사 인사장교와 통화를 했던 건데 목적은 동일했다. 특전사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니 명단에서 빼달라는 거였다. 주로 무릎이나 허리에 병증이 있다는 이유였는데 적어도 그들 모두는 나보다 뛰어난 체력과 신페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난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개관적인 자력표를 보고 특전사에 필요한 요원을 선발한 건데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다. 병사도 아니고 위관장교 중 최고 계급인 대위들이었다. 그들을 경멸하며 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에게 특전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전사에서 상사로 근무하다 장교로 재임관하여 대위가 된 나이 많은 형이었다. 그 형은 내가 명단에 들었다고 하자 딱 세 가지를 물었다. 너 축구 잘해? 수영 잘해? 술 잘 마셔? 노, 노, 노. 그날부터 난 일과를 마치면 아까 그 707부대에 내 대신 지원된 친구와 또 한 명의 특전사 발령 예정자와 함께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버스로 15분~20분 정도 거리의 영회자 숙소 단지에 위치한 수영장에 등록한 후 갈 때는 셋이서 달렸고, 수영 수업이 끝나면 생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막차로 기숙사로 복귀했다. 과제는 대충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체력은 고갈되어 침대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수업보다 과제보다 등수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수영장까지 달리다 보면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동기들이 창문밖으로 손을 흔들며 ‘특전사 파이팅!!’을 외쳐줬고, 셋은 수영강사와 함께 급속히 친해졌고, 체력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물을 무서워했고, 대학시절 조정부 동아리 활동 중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던 나는 자유형, 평영부터 배워야 했고, 접영 수업을 시작하고 며칠 되지 않아 중대장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발령을 받았다. 증평에 위치한 제13공수특전여단. 우연처럼 내게 특전사를 알려준 그 형이 근무하던 부대였다. 보트를 타고 출근한다는 그 부대. 두려웠지만 죽기야 하겠어? 달래고 다독였다. 그래 707 아닌 게 어디냐.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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