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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소풍이 끝나고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들: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배움

by 김원자 Dec 11. 2024


우리 삶에는 눈이 부시게 찬란했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이파리 다 떨구고 서 있는 겨울나무처럼, 아니면 그 나무 밑에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지기 직전의 쳐진 낙엽과도 같은 시간들이 있다.

생의 한가운데가 있듯이 생의 끝자락이 있다.  소풍이 끝난 것이다. 나의 어머니 김설희 여사가 그렇다.

올해 4월 7일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102세에 먼 길을 떠나셨다. 2년 전, 저 지난해에도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계셨다.  언제 휙 날아가버릴지 모르는 종잇장같이 가벼워진 모습을 보며 우리 형제자매들은 그때부터 이별준비를 했다.

100세에서 한 살 부족한 99세를 선조들은 白壽라 했다. 일백百자에서 한 획을 뺀 白을 쓴 것이다.  白壽기념사진집을 묶고, 세 딸들이 재능을 발휘한 안방 전시회도 열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 노력했다.


그때 쓴 사진집의 서문이다. 셋째인 내가  쓴 글이다.



어머니가 있는 풍경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1923년생인 어머니의 白壽를 맞으면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새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곧 환갑을 맞을 막내와 위로 80에 가까운 큰 딸까지 3남 5녀 여덟 명의 자녀를 낳으신 어머니는 비록 좀 일찍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긴 했지만 참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자손들이 다 무탈하고 아직까지 당신 정신 줄을 놓지 않고 계시니, 조금만 더 건강해지셔서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나온 세월은 가족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우리를 즐겁게도 가슴 아프게도 하는 추억과 사연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항상 어머니가 든든한 나무둥치처럼 계셨고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모아보니 어머니란 존재는 정말 거대한 뿌리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오로지 가족중심의 삶을 사셨고 우리는 그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우리 여덟 형제들의 헌신적인 어머니, 그리고 인생을 참 곱고 선하게 살의 신 김설희 여사님, 白壽만세!  



브런치 글 이미지 2

그 후 벌써 2년이 지났다.

떠나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가랑잎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셨다.

대소변 길이 더 어려워져 잦은 실수를 하시며, 음식을 씹는 힘, 삼키는 힘이 약해져 식사량이 줄었다는 것,  그리고 옆에 사람이 없으면 더 불안해하시는 아기같이 어려진 모습으로.

어머니 노후 뒷바라지를 어쩌다가 셋째인 내가 맞게 되면서 어느 사이에 5년째가 되었다. '어쩌다가'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운명적으로 어머니와 나는 연이 더 길었던 같다. 다른 여자 형제들보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다.

언젠가 서울에 사는 여동생의 배려로 3박 4일 어머니 곁을 비워주고 남쪽 바닷가 마을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첫날 잠을 자다가 어디선가 쫄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그게 어머니 오줌 싸시는 소리로 들렸던 것 같다. 동행인이 보니 벌떡 일어나 "우리 어머니 오줌 싸시네 " 하더란다. 실은 시골집 마당에 있는 연못에 연결된 호스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오줌 소리로 들릴만큼 노이로제가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그때 기저귀를 착용하지 않으시려는 고집이 있었다. 요의를 느끼면 변기를 꼭 찾으신다. 끼워드린 기저귀를 스스로 다 떼어내 기어코 일어나 변기에 앉아야 일을 보신다. 그걸 존중해 드리려는 일도 간단한 것이 아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환자와 함께 지내는 간병인들이나 한 가족의 마지막을 지키는 누군가에게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질병을 함께 겪게 되는 것 같다.  더러는 가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대단치 않게 넘기기도 하지만 환자 돌보는 게 직업인 간호사에게는 그냥 지나칠 일들이 스트레스가 되어 몸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내 경우는 딱 중간쯤이었다. 어느 날은 완전히 어린애 같은 어머니의 행동들이 "나의 어린 시절엔 더 했을 텐데" 라며 관대해졌다가, 어느 날은 또 한없이 고집스럽고 망가지는 노년의 모습이 그냥 싫어지기도 했다.

잠을 못 드시는 밤이면 어머니께 초저녁께 수면제를 반알 드시게 한다. 그러면 약 30분 후면 주무시게 되지만 함께 깊은 잠을 잘 수는 없다. 또 금방 깨셔서 옆에 있는 간이변기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확실히 짧아진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이 생명을 얻어 태어나 1백 년을 지상에 머물다 떠난다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그 삶의 의미와 가치의 유무에 상관없이 경의를 표할 일이라고 본다. 육체가 시들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는 태어나는 새 생명들에게 했듯이 알뜰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는 없을까?

브런치 글 이미지 4


이제 어머니와 유난히 연이 길었던 딸의 입장이자, 가족요양보호자라는 직업적 입장, 두 가지가 함께 있는  나의 시각으로 어머니 생의 끝자락의 모습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쓰기 시작은 했지만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던,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아픈 기억들이지만  삶의 마지막 무렵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쓰겠다.


흔히 현대적 고려장이 아니냐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가정에서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일이 앞으로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자녀가 7, 8명씩이나 되어 한두 명쯤 남아있던 예전의 가족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령화 시대가 되면서 '편안한 노년 맞기'가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된 요즘, 이 글이 노년기 삶에 조그만 성찰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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