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수요일> Chapter 9. 열정맨 광고기획자 Y의 이야기
직업인으로서 지인들을 알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짤막한 에세이를 부탁했다.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담으면 더 재미있겠지만,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즈음의 사정상 카카오톡 대화로 대체했다. 그들은 직업인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 직업을 대표할 수는 없다. 각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와 감상을 담고 싶어 욕심을 조금 냈고, 만에 하나 돌을 던질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몫이다. 에세이의 주인공은, 읽는 이의 감상을 위해 공개하지 않을 예정.
직무의 특성상, 그리고 내 학부 전공 특성상 광고, 마케팅, PR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그래서인지 그들과의 인터뷰가 좀더 쉽고, 그런 사람들과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밖에서 보면 비슷한 업무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들의 업무가 실상 다 다르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 또한 다 다르다는 점이다.
오늘은 내가 아는 가장 열정 넘치는 광고기획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연차라 시니어까지는 아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광고의 한복판에서 연차 대비 엄청난 경험들을 쌓고 시니어급 주니어로 성장한 AE다. 사회초년생 시절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었다는, 그래서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고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것만으로도 일부는 자아 실현이 되었다는 그를 볼 때면 가끔은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부인할 수 없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그랬던 시절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 또 즐겁고 - 회사에 가고 싶어 주말엔 발을 동동 굴렀던. 혹은 다른 사람들은, 에이 회사는 회사일 뿐이지 하고 선을 그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를 연재하며 나는 지속적으로 이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기실 우리는 사회에 때가 탈 대로 탄 엄청난 사회인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사실은 직업을 선택할 때 어딘가 가슴 속 한켠에 엄청난 열정을 품고 출발했던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의 경험에 기반해 쓴 그의 글도 역시 그러하다. 물론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겪은 워라밸의 파괴, 현실과 고통을 그 역시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광고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의 글 역시 거의 손대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잊고 있었던 어떤 열정이 느껴지길 바라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멋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멋’ 이라는 것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유창한 언변으로 이야기 하고, 설득하고,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나는 멋있게 느껴졌다. 이런 이유로 광고기획자, AE를 꿈꾸게 되었고, 그 직업을 위해 여러 가지를 노력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유창한 외국어로 외국인을 설득시킨다면? 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어까지 공부하기도 했다.
내 첫 직장은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디지털 광고 대행사였다. 이른 아침, 한국의 중심지 강남으로 출근을 해서, 하루에 4-5번씩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제안서를 작성하는 모습은 내가 꿈꿔왔던 광고인의 모습과 꽤나 닮아 있었다. 여기까진 자아실현 70% 달성. 그러나 한가지 간과했던 점은, 이 회사의 광고인들은 새벽 3-4시에만 집에 가도 행복해한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워라밸 박살!
덕분에 이 시기부터 나의 자아실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첫 3개월 정도는 그동안 비축해두었던 체력 덕분인지 광고인 뽕(?)에 취해서 누구보다 즐겁게,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서 했지만 그 이후로는 글쎄? 힘든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무언가를 볼 떄 단편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 온라인 / 오프라인 마케팅을 두루두루 겪어본 사람,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 그래서 어떤 일에 투입되어도 기본 이상은 하는 사람 – 내 기준 ‘멋’ 있는 사람의 자아실현은 일부 회사가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그 자아실현 덕분에 나는 행복했을까? 몇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앞서 말한 기준을 충족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 기준들 앞에 ‘행복한’ 이라는 단어를 붙여보려고 한다. 자아 실현과 동시에, 행복이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도 요즈음 나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이기 때문.
지겹도록 당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행복과 자아실현은 워라밸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거라는 사실을. 출세와 명예는 워라밸이 없더라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출세한 사람들을 보면 절반 이상은 행복해하지 않았다. 혹은 어디가 아프던가?
누군가는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마치 젊은 친구들이 일하기 싫어서 만든 가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워라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을 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맞춘다는 데 방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일이 너무 없으면 불안하고, 일상이 너무 없으면 힘들다.
나는 스스로를 굉장한 워커홀릭이라고 여겨왔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조건 운동을 한다고 근육이 늘지는 않는다. 하루 열심히 운동을 하면, 하루는 쉬어 주어야 늘어났던 근육들이 회복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아마 우리의 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워라밸이란 단순히 쉰다는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를 충전하고 더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가끔 광고대행사 사람들은 자신들의 워라밸이 부족함을 한탄하면서, 훈장처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러지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적당히 쉬세요, 아이디어가 더 잘 나올걸요?
출세와 명예라. 둘 중 하나라도 챙길 수 있으면 좋겠다!
막 업계에 발을 들인 쌩 주니어 시절에는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출세(=’부’) 와 명예가 저절로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보다도 더 열정 넘치게, 불만 없이 시키는 일을 꿋꿋하게 했던 것 같다. 세상이 변한건지, 내 관점이 변한건지 알 수 없지만, 일만 해서는 출세와 명예를 둘 다 챙기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한 회사에서 꿋꿋하게 버텨 임원급의 위치에 오른다고 해도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그 사람을 명예롭게 출세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시간과 노고는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비판한다.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광고인에게 출세와 명예란 무엇일까?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더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치가 바로 이 '출세와 명예'가 된 것 같다. 대학 시절에만 해도, 이름만 말해도 알 수 있는 굵직한 기획자, CD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런 이름들이 사라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렇기에 광고 기획자를 꿈꾸고, 출세하고 명예까지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감히 작은 조언 하나 하자면, 한 가지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직무 경계 붕괴, 넘치는 야근, 끊임없는 트렌드 공부. 뭐 하나 편해 보이지 않는 기획자의 삶을 조금이나마 겪어본 뒤 내 나름대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대다수의 기획자는 강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주도적으로, 때로는 수동적으로(?), 때로는 주인으로, 때로는 노예로 쉴 새 없는 포지션 변경, 필요하다면 직무까지 변경 – 첫 직장에서는 심지어 택배기사님까지 되어본 적이 있다 – 하며 다방면의 지식과 체력을 쌓는다. 한가지만 우직하게 해서 성공하면 좋겠지만, 기왕 기획자가 된 거 기획자만의 특성을 살려서 출세하고 명예를 챙겨 보는 건 어떨까?
광고기획자 지인들을 둘러보면 인플루언서, 유튜버, 작가, 포토그래퍼 등 요즘 대세인 ‘부캐’ 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하며 얻은 노하우로 취미를 만들고, 즐기고, 더 나아가 돈까지 버는 모습을 보면서, 광고 기획자의 출세와 명예를 꼭 광고업에만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의미는 좋게 포장했으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듯. 10점 만점 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