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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슬 Apr 29. 2022

[아내일기]#7 우리 바질이에요.

처음으로 집에 싹이 나고 잎이 났다.

'틔우기도 못해 키우지도 못했다'


결혼 후 우리부부는 하찮은 곳간을 늘려보자며 소소한 성취를 위해 '모든 곳에 모든 것이 다이써'에 들려 씨앗 키트 꾸러미를 집으로 데려왔었다. 각자 작은 방에서 자취를 할 땐 꿈꿀 수 없던 것들을 하루하루 이뤄나가는 신혼재미에 빠져 새생명 심기라는 꿈도 하나 더 추가 되었다.


근데 그해 겨울, 유난히도 춥고 깊게 지나더니 우리마저도 낯선 동네에 무덤히 이 씨앗을 놓았을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의 애절함을 뒤로하고 새싹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울리는 이름도 붙여주고 매일 엎드려 종알종알 잘 자라고 있는거냐며,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거냐며 보살피던 남편의 모습에 얼른 고개를 내밀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던 그 성취는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새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단지 '소소했던 그 성취'는 너무도 겸손치 못했다.


(왼) '오이소'와 '방울이'를 심었지만 싹은 구경도 못해본 지난 해 봄 (오) 매일 퇴근하면 '오이소'와 '방울이'와 대화했던 남편


안타깝게도 해가 너무 잘 드는 집이지만, 낮에 사람이 없다보니 누구도 돌봐줄 수 없어 그런가. 위 사진 중 보이는 화분 중 한 아이만 잘 살아내고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 추천하는 여인초... 정말 기특하게 잘 자라요)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 선물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모든 일은 준비없이 찾아오듯 갑작스럽게 수술을 했다. 생명에 지장없는 수술이었지만 걸을 수 없어 집에서 2~3개월 정도 재택을 하게 됐다. 온 지구가 역병으로 난리나도 절대 재택은 하지 않던 회사였고, 악착같이 강남역으로 출근하던 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온전히 쉴 수 있던 집에 재택환경을 만들어야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냥 어쩌다 삐끗한건 줄 알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자책하기 바빴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눈 뜨면 나가고, 해지면 집에 들어오던 것이 일상이었던 보통사람에겐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생활의 불편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은 별일 없이 끝났지만, 쉬운 케이스가 아니었기에 이 회복속도가 더딘건지, 엄살인건지, 괜찮은건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타고난 노예근성인데다가 걱정인형인 나는 이대로 집에 들어앉게 될까봐 불안이 커져만 갔다. 아마 이런 날 지켜보는 남편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바질씨앗' 한 봉이 도착했다. 유난히도 가물었던 올해 봄, 지독한 산불이 계속되고 새댁 주머니에서 조금이나마 보태보려는 찰나 제주도 희귀 식물 그림이 그려져있는 컵을 사면 기부활동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컵과 함께 사은품으로 온 씨앗이었다.



'씨앗'을 주문한건 아닌데요 어쩌다보니 '씨앗'이 메인이 되어버린 택배상자



남편은 내가 조금씩 걷게되자 다시 배양토를 비롯해서 이번엔 조금 더 탄탄한 흙들을 종류별로 구입해왔다. 그리고 거실 한 바닥에 신문지를 가득 깔고, 오이소와 방울이를 심었던 키트 화분에 씨앗들을 뿌렸다. 그리고 흠뻑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씨앗을 감싸는 물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이 수분 보호막 안에서 쉬다가 싹이 나올거야"


신기하게도 한번 생긴 물막은 자궁 속 양수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그 물막을 보고도 처음엔 별 기대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물을 주더라도 얘는 죽어버릴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재택하는 책상 한 켠에 은근히 보이는 구석, 불편한 무릎을 조금이라도 다른 자세로 놓으려하면 열심히 물막 안에서 애쓰는 것 같아 보이는 씨앗들이 보였다. 나는 눈에 띌 때마다 물을 주고, 닫아놓았던 암막 커튼을 열어 작게 열어둔 창가 앞으로 바람을 느끼게 화분을 옮겨 놓았다.


그렇게 2~3일이 지났을까. 보통 3일이 지나면 발아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 화분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그 다음날 4일 저녁에도 아무런 발아소식은 없었다. 열심히 돌보아도 안되는건 안되는가보다 저 흙은 어디에 갖다 버려야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남편이 이거봐! 라고 했다.


5일쯤 지나 남편도 재택하는 날 아침, 바질에 싹이 났다.

너무 작고 소듕해 ♥




'그 중에 느린애가 있어. 그래도 같은 바질이야. 열심히 크고 있어'


남산만한 등짝을 말아 옅게 틔운 바질 새싹을 보는 남편의 등이 기세등등하다. 이 날 이후 눈 뜨고 뒤 돌면 바질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쯤되면 정남향인 거실창을 열어 창 틀에 바질 화분을 두고 물을 준다. 그럼 기분 탓일까 '호들호들' 살랑인다. (약간 오글거림 주의)

어느 새 봄은 벌써 지나고 날도 많이 따뜻해졌다. 보조기 하는 날이 점점 줄고 나는 마지막 진료일을 정하고, 이제 곧 출근을 앞두고 있다. 기다리고 때가 있다는 말은 언제나 맞는 말이지만, 그 말에 신뢰를 갖고 기다리는 성인으로 크기 쉽지 않다. 근데 기특하게도 저 옅은 싹들이 그렇게 크고 있다.


제법 잎도 갈라지고, 줄기도 단단해지는 새싹들


하지만 이 중에도 언제나 느린 아이는 있다. 어제 간만에 저녁자리를 하고 퇴근한 남편에게 호들갑 떨며 오늘은 더 자란 것 같다며 오늘 내가 돌본 바질들이 얼마나 푸릇한지 우쭐하며 자랑했다. 그러자 남편이 역시나 아쉽지 않은 리액션과 함께 이 아이를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엇, 엄청 작은데 나름 쌍떡잎이 났네!!"


남편이 얘기하길,

다른 자리에선 손가락 한 마디씩 크고 있을 때 유난히 싹이 안트는 씨앗 한 알이 보였다고 한다. 왠지 곧 싹을 틔울 것 같이 보이기는 하는데, 조금 두꺼운 흙이 위를 덮어 못나오는 것 같았다고.

 

저 모래같은 흙을 치워줘야 할까, 아니면 괜히 건드렸다가 그 마저도 포기해 아무것도 안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에이 몰라' 하고 말았다고..


그렇게 괜히 모른척 한게 맘에 걸려 화분을 볼때마다  자리에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는데  자리에서  싹이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나름의 모양을 갖추고 말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이 녀석 열심히 더 크고 있다. 유난히 지난 새벽 더 추웠는데도 말이다. 조금 늦어도 같은 바질이라며. 이렇게 모양도 똑같고 잎은 작아도 줄기는 똑같이 두껍다고. 그렇게 열심히 크고 있다. 내가 혹여나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자기확신이 부족한 시점이 오면 남편은 언제나 '내가 그 불안은 없다는 걸 보여줄게'라 말하고 내가 볼 수 있도록 행동한다. 이 작은 새싹이 그 중 하나다. 이 옅은 새싹이 그렇게 울컥한다.


세상사람들 우리 바질이 좀 보세요. 이렇게 잘 자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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