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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슬 May 08. 2022

[아내일기] #8. 덕분에 행복했다.

우리 소사를 기억하는 붕붕이, 이젠 안녕.

'슬기야, 일어나. 아빠랑 나갔다오자'


내가 10살 되던 해였다. 짜장면 배달을 위한 오토바이 뿐이던 우리집에 당시 최신식 아반떼가 생겼다. 아빠는 주말만 되면 아침 안개 가득한 춘천 이곳저곳에 날 데리고 다니곤 하셨다. 나는 토요일 아침 7시만 되면, 아빠 의 양말 서랍 여는 소리를 기다리곤 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는 쏙 빼고 외동딸로 한자리 하고 운전석 옆에 앉아 아빠와 간단한 아침 등산도 하고 버섯전골 한 그릇하고 오는게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지방러의 서울행, 그리고 다시 귀향. 아빠의 선물] 

2015년, 서울로 취업한지 3년 만에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작은 원룸에서 뺀 짐들을 트럭으로 먼저 보내고 늦은 밤 시외버스를 타고 올림픽대교를 건널 때 왠지모를 초라함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전쟁에서 패하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귀환이라고 생각했다.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자존감이 매우 낮아져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다. 아빠의 머릿속에는 폭탄이 있었고, 의사는 그나마 가능한 시술조차 시신경을 건드릴 수 있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엄마는 질려버린 배달원들의 장난으로 다른 장사를 시작했지만 결국 다시 중국집을 시작하시면서 동네 뒷말들과 30년 세월의 이름값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셨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안 사실지만 정말이지... 입을 다물 수 없는 이야기들...) 언니는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했다. 이 때 우리 가족 모두는 누구 하나 내 여기 지나갔음을, 남아있었음을 누구도 알리지 말아주오 하는 심정으로 발걸음 하나 조심조심 세월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아빠는 수 천개의 신경 중 시신경을 살릴 수 있다는 의사를 찾아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다시 이전처럼 자리를 잡으시며 안정된 가게 운영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언니는 아이가 조금씩 말을 하고 형부와 시댁의 도움으로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아빠의 수술 일정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며 춘천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욕심이 있다면 서울로 가야했지만 춘천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기업을 찾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종/직무에 이력서를 넣었고, 운 좋게 합격했다. (이 과정에서도 물론 쉽진 않았다)


내가 춘천에 자리잡기로 결정하자 부모님은 첫 차를 구입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물론 지방 회사들이 거의 모두 그렇 듯, 회사 셔틀 이용이 가능했지만 택시를 타고 셔틀 탑승장까지 이동해야했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대기 시간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집 보증금을 일부 빼기도 했고 나름 그래도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금액과 그래도 고생한 것들이 있으니 일부 도움을 받아 아반떼로 구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차가 생겼다. 나는 그렇게 20년이 흘러 아빠와 함께 주말 아침 드라이브하던 길을 따라 아빠에게도 첫 차였던 아반떼를 타고 출근 했다. 첫 출근날 깊은 감정이입은 금물이지만 아마도 그때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아빠가 건강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 세상 모든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 감사드린다고 하며 출근했던 것 같다.


[기동력, 갖는자에게 오는 여유와 기회]

그렇게 내게   차는 기동력을 가진 인생이란 이런 것임을 가감없이 빛내주었다. 당연히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쉽지 않았지만, 오로지 홀로있을  있는 나만의 공간은 위로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을 추스리기에 충분했다. , 아직  가지 않은 가을 바람을 맞으며 의암호를 달리던  때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언제 한번은 갑작스런 결혼으로 미국으로 떠나게  친구와 주말 오후 갑자기 떠나게  강릉여행은 지금도 잊을  없다. 주말에는 꿈도   없었던 양평 유명카페를 평일 퇴근 후에 언제든   있었다. 집순이의 인생이  차에만 오르면 기동력을 얻어  많은 경험의 바다로 거침없이 항해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과의 인연도 이어지며, 나는 부딪히는 인생에 대해 거침없어졌다. 그렇게 전공과는 무관한 선택과 본질에 집중하며 서울로 돌아올  있는 열정을 다시 만들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울로 이직을 했다. 물론 나의 '반떼' 함께 였다.



뜨거운 여름 날,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의 시작이 달갑지 않아도 괜찮았다. 주말이 되면 나는 좋아하는 구두를 신고 책 한권을 챙겨 차에 올랐다. 짐이 많아도 괜찮았다. 트렁크에 캠핑의자를 넣고 아무도 없는 강가를 찾아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좋아하는 책을 두 장만 읽어도 괜찮았다. 조금씩 외로워지기도 했다. 외롭다고 느끼는 이 감정도 좋았다. 누군가와 같이 드라이브를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좋은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를 즐기는 것도 이제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구나 싶었다. 두 손이 무겁지 않아도 되며, 언제든 가족들에게 갈 수 있다는 안도감. 그것만으로도 서울에 혼자 있어도 괜찮았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것과 내게 반떼가 함께하게 된 것은 내 인생에 많은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종종 아빠가 혼자 서울에 진료오실 때 "내 차로 모시러 갈게"하는 것도 기분 좋았다. 내게 반떼는 그래주었다. 선뜻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할 수 있어"라고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연애 시작과 결실을 함께한 자동차]


" 제가 매일 데릴러가곤 했어요. 연하 남치을 위한 누나의 서비스랄까 ㅎㅎ" 


시할머님 댁에 멀리사는 큰집, 우리집 등등 모든 식구가 모였다. 내 옆에 딱 붙어 고무장갑 위로 흘러내리는 소매를 남편이 접어주고 있었다. 거실에서 주방 쪽을 바라보시는 시어르신분들께서 "그렇게도 아내가 소중하냐며, 우리집 식구지만 자상하면서도 참 애낀다~"라시며 흐뭇하신듯 즐거운 농담을 즐기셨다. 


그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우리 연애 때 얘기가 나왔는데, 나이차 얘기가 나오며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당시 이제 막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1년 조금 넘은 애송이 같았던 남편을 난 주말에 자주 데릴러갔다. 늘 잠이 많아 데이트시간을 놓치던 그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기는 커녕, 나를 그의 집 앞으로 스스로 오게끔하는 매력의 소유자랄까... 


이 글을 쓰면서도 '퓝'하고 웃음이 난다. 나의 반떼를 타고 구의역에서부터 충무로역까지가며 동호대교를 건널 때면 설렘 가득한 노래를 들으며 참 많이도 흥얼거렸다. 9월 말쯤, 날씨라도 좋을때면 창문을 내리고 마치 성공한 누나의 연하 남친 꼬시기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한 손으로 운전하며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이제 막 왔다는 듯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라고 하기까지했다. 


그때 생각했다. 데이트하려고 뾰족구두 신고 아침 일찍 잔뜩 꾸미고 나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겨우 충무로역에 도착했는데 그가 준비를 다 안했다며 기다리라고 했다면 택시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반떼에서 여유롭게 앉아 주차 잘하는 누나,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연하남에게 "천천히 하라니까~"라는 여유를 뽐낼 수 있었던. 그 추억이 가득하다. 


그는 이제 막 서울에 올라온 경상도 남자. 서울 바닥에서 안가본 곳이 더 많고 경기도 여행은 꿈꾸지도 못했던 사람. 나는 그를 보조석에 태우고 누구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 남양주 카페를 서스름없이 데려가고, 파주며 김포며 인천이며 이 차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멋진 여자역할을 주로하곤 했다. 


반떼는 이렇게 우리 연애의 결실로 결혼을 준비할 때도 함께 였다. 비록 뚜껑 열리는 비싼 외제차가 아닐지라도, 강남대로에 달리는 수 많이 반짝거리는 세단들 사이에서 연비 19km를 자랑하는 이 기특한 작은 차는 어느때보다 차가 필요했던 결혼 준비 기간, 그 기동력을 거침없이 발휘했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일단 가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그 때 이 반떼가 있었기에 여기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결혼하고 남편에게 첫 차를 선물하며, 나의 첫 차를 보냈다. 남편도 말은 안하지만 보내는 그 뒷모습을 잘 찍어 내게 보여줬다. 나의 작은 소사를 담았던 첫 차. 반떼가 새 좋은 주인을 만나길. 나에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지금 일어나 이 차에 오르면 그곳이 어딜지라도 분명 목적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것이다.  


결혼식에도 함께였던 반떼


여러분들에게도 있나요? 결혼 후에 연애 때를 기억하고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소중한 물건. 흔슬에게 반떼는 보내졌지만 아마도 길가다 만나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남편과 어딜 갈때면 반떼와의 이야기가 가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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