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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슬 Apr 26. 2022

[아내일기] #6. 장사 30년, 부모님이 은퇴했다.

오늘은 아내가 아닌 딸이 쓰는 일기 


대단한 이야기를 남기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릴적 위인전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에도 부모님 이야기를 써갔던 고집스런 나였기에 부모님의 은퇴는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어 마음이 요동치는 요즘이다. 


하얀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던 38키로의 긴머리 여대생이 가진 기술이라고는 짜장 볶는 기술 뿐인 무뚝뚝한 남자를 만나 무일푼으로 트럭에서 짜장면 600원일때부터 시작하셨단다. 그렇게 약 30여년 간 거친 세월 지나와 이제는 직원 네 분과 함께하며 동네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았다. 

아주 오랜세월 이제 그만하자 그만하자 하시면서도 그 자리 그 시간에 가게 문을 여시던 이 두분의 마음은 오죽하실까 싶어 하루에도 전화를 두 어번은 더 하는데, 그 목소리 끝에 미련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여자의 인생을 논하자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서럽디 서러운 대하드라마 몇 편은 나오고,

한 남자의 인생을 논하자면 그럴싸한 상업 영화 몇 편은 쓰고도 남아 눈물 콧물 쏙 빼는 이야기 봇짐 몇 개인데그 와중에 어려움 살림 고이 펴냈건만 아이도 어렵게 가져 맘 고생도 오지게 하셨단다.

근데 그 애들이 건강하게 자랐고, 마침 이 장사기술이 있어 장사하시며 살림하시며 아이 보며 공부도 시켰고, 강원도에서 서울살이도 시켰고, 결혼도 시키셨다. 이제 먹고 살만큼 냄겨놓고 미련없이 뒤 안돌아보기로 다짐아닌 다짐을 굳게 하셨는데 자꾸 미련 한가닥 남기고 손 끝에 두신다. 


얼마 전, 곧 마지막 장사를 앞둔 부모님을 뵈러 언니네 가족과 시간을 맞춰 마지막으로 아빠 요리를 맛보기 위해 춘천에 다녀왔다. 참, 이제와서 글로 쓰는 아빠의 맛이지만 아빠 짜장면은 정말 새카맣다. 대학교때까지도 다른 집 짜짱면은 먹어본적이 없는 나는 직장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아빠 짜장면이 정말 새카맣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흔치 않은 검정색이 진한 짜장면이라는 것을 점심시간이 소중해졌을 때야 알게되었다. (백종원 아저씨에게 사심없이 전달하고 싶은 맛이다)


이 와중에도 아빠딸 최애 메뉴가 있는데, 짬뽕 만들다 물 타는걸 깜박해 볶아버려 탄생했다는 볶음우동이 우리리집 자랑 메뉴다. (이건 비비고에서 양념장을 만들어 수출해야한다며 떠들던 추진력은 없고 아빠음식은 그저 자랑스러운 딸들의 너스레다) 정말이지 다른 지역에서 이름만 붙인 볶음 우동하고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라고 우리만의 불맛도 자랑해본다.) 왜 이 불맛이 차별점이냐면 이건 불맛이 일품인 짬뽕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정말 웃긴 일화가 있는데(나에게만 특별했던 ㅎ) 금요일에 회사를 마치자마자 기차를 타고 춘천에 와서 택시를 탔다. 가게 이름을 대고 가달라고 하자 택시 기사님이 "그 집 짬뽕이 참 맛있는데, 드셔보셨어요?"라고 하셨다. 모른척 '네' 라고 하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아빠 음식에는 정직함이 있고, 철학이 있고, 항상 음식이 똑같고~ 등등 이 얘기만 하셨다. 그냥 우리 아빠 음식이라 내 입맛에 맞나 했던 나의 믿음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아빠의 음식을 먹으며 여전히 이 음식이 세상속으로 사라지기엔 아쉽지만 다 큰 내가 지금도 들 엄두가 안나는 저 중식 웍과 화구를 바라보면 이제 불효는 할만큼 했단 생각이 든다. 


나는 유난히도 부모님의 꾸준함을 오랜 시간 존경하고 사랑해왔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가게는 항상 같은 시간에 열리고 닫혔다. 물론 모든 장사하는 집안의 자식들이 그렇듯 어릴적 학교 행사에 부모님이 늘 함께 하시진 않았다. 그때마다 언니도 나도 동네 삼춘이나 이모가 그 자리를 대신해주셨고, 우리는 강원도 춘천 효자동 온 마을이 키운 애들이 되었다. (얼마전 우리들의 블루스에도 나왔지만 그래서인지 지방엔 비밀이 없다.) 그만두기 직전인 최근까지도 정기휴무인 수요일 외에는 정말 특별한 일 (직원 가족의 경조사)이 아니면 쉬시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서울까지 병원을 다니신 아빠는 새벽같이 서울로 출발해 병원 첫진료를 보시고 춘천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재료준비를 하시고 요리장으로써 자리를 지키셨다. 여전히 요즘 사람들과 같은 그 흔한 주문 시스템 하나 없이 종이 지도를 벽에 붙이고 전화로 주문 받으시며 (그나마도 최근에 배달의 민족을 이용하셨다) 동네 단골 목소리와 주소를 꾀고 계시는 엄마를 바라볼때면 나의 직장생활이 '겨우'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다. 비록 내가 직접 '장사'를 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곁다리 건너 곁눈질만 했음에도 '직장'에서 고용인으로서의 고용주를 대하는게 어려울 때 내가 이것마저도 못하면 뭐해먹고 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 그랬던가. 음식장사는 바닥 중에 바닥일 때 할 수 밖에 없을 때 해야 하는 것으로 발담그게 되는 것이라고. 그만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자매 기억 속에 차마 남기지 못해 부모님 기억속에만 남아있을 이야기도 수백개아니 수천개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빠의 음식 솜씨가 소문나기 전에는 엄마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서 학교든 공사장이든 엄마의 도시락이 여기저기 팔렸다. 애기였던 나인데도 엄마가 앞치마를 하고 한 켠에 주무시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빠의 음식이 소문났을 땐 IMF 때에도 , 2002 월드컵 때에도, 여러 날들을 지나 지금 코로나가 오래될 때도 사람들은 좋은날이나 나쁜날이나 감사하게도 아빠의 짜장면을 찾아주었다.


그 덕에 우리는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자랐고, 나는 원하던 공부를 계속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었다.

이 당시들을 하루, 한 해 씩 곱씹어보면 금새 눈시울이 붉어질만큼 어려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행인지 바람처럼 스치듯 그 날들은 기억속에서 흘리고 여전히 내 기억엔 아빠 오토바이 앞에 타고

삼포 계곡으로 가는 터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어느 날은 몰래 엄마 아빠, 언니가 학교에 찾아와 날 데리고 에버랜드에 갔던 그 행복했던 기억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더 살기 어려운 요즘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생이 그때마다 그래야하고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힘든 시간을 겨우겨우 버텨 이제 한숨 돌리고 겨우 허리 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맑다.


요즘 세상엔 이런것들도 있다며 하고 어색해진 세상에 어른들도 요즘은 할줄 아는게 많은 세상이라는데 우리 부모님은 참 유난히도 장사밖에 모르고 사셨다.

이런 부모님이 이제 30년 음식점을 다른 누군가에게 이름 그대로 역사를 넘기고 그만두신다.


언젠가 울릉도를 가보고싶다 하셨고, '콤퓨타'를 배워보고 싶다 하셨고,

남해가 그리 아름답다 하셨는데 그 먼데 가 언제 돌아와 장사하냐고 걱정하시던거 다 떨치고

그 경험 다 하실 수 있도록 그나마도 가장 늦은 나이에 놓은 이 막내 딸이 좀 더 부지런을 떨어봐야겠다.

저녁 쯤 다 되어서 수고하셨다 마음이 어떠신가 연락드리니


"이제 시간나니 부지런히 먹고픈거 해줄게" 하신다


난 아직 엄마가 안되어 모르는데, 엄마는 결혼한 딸래미 울리는게 취미인가보다.


가난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 참 열심히도 사셨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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