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책사랑은 유별나다. 어딜 가든 늘 책 한 권은 품고 간다. 그리고 어디서든 책을 펼쳐든다. 책 주제는 육아, 교육, 역사, 미술 등에 편중되어 있는데 주로 비문학을 읽는 편이다. 반대로 나의 독서는 목적성이다. 정해진 자리에서 업무와 관련된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 걸 선호한다. 따라서 어딜 가면서 책을 챙겨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엊그제는 분당 정자동 물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다. 햇볕이 유난히도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다. 처서가 지난 8월 말 날씨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더운 날이었다. 보통은 내가 물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는데 이날은 아내가 먼저 물에 들어갔고 자연스레 나는 밖에서 서포트해주는 상황이 되었다.
무더위에 아내와 아이들은 물밖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나왔다가도 다시 덥다며 물에 들어갔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나는 캠핑 의자에 앉아 그동안 미뤄뒀던 프로야구, 프로축구 동영상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콜성 폭우였다. 순간 여기가 분당 정자동인지 태국 까오산 로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시원스레 내리던 비를 싸와디깝 하면서 바라보다가 아차차, 펼쳐둔 짐이 있음을 깨닫고 비에 젖지 않게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아내가 가져온 책을 만지게 되었다. 곽윤정 작가의 <우리 아이 공부머리>라는 책이었다. 요즘은 다시 육아서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시간도 남는데 서문만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흥미라는 것이 발동하기 시작했고 이내 몰두해서 읽기 시작했다.
분당 정자동 물놀이터는 45분 운영에 15분 휴식인데, 나는 45분 책 읽고 15분 아이들 케어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어나갔다. 아이들 뇌의 단계적 발달에 대해 다양한 연구결과와 이론, 경험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좋은 책이었다. 특히, 아이들 노는 것과 관련한 내용들이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아래는 책 내용 중 놀이와 관련한 일부를 발췌하여 살짝만 편집한 것이다. (작가의 생각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 원문 그대로 싣는다)
인간의 뇌는 가소성 plasticity 을 가지고 있다. 원래 가소성이란 물리학의 개념인데 외부의 힘에 의해 변한 형태가 그 힘을 제거해도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성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소성 개념은 인간의 뇌에도 적용된다.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의 뇌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뇌세포에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능력(혹은 정보)이 담겨 있다. 이러한 뇌세포가 낱낱의 형태로 있을 때는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냅스 synapse 라는 연결망을 통해 작동하면 다양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시냅스가 많을수록, 즉 뇌세포끼리 연결이 많이 되어 있을수록 뇌가 정보를 효과적으로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는 아이의 뇌 발달과정에 따른 시냅스 연결 사진이다.
그리고 이러한 뇌세포 간의 연결, 즉 시냅스는 외부자극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아이가 처음으로 접하는 수학문제를 푼다고 하자. 이때의 수학문제는 아이의 뇌에 주어지는 외부자극일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학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낱낱의 수학지식은 뇌세포 각각에 흩어져 있지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그러한 개별 정보가 이리저리 연결되어야 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시냅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냅스는 다음에 비슷한 수학문제를 풀 때 비로소 그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수학문제를 만나면 또 다른 시냅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렇게 시냅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가소성(변한 형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가지게 되며, 이를 통해 잠재력이 발현되고 이후에는 본인이 가지는 능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시냅스의 형성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외부자극과 같은 새로운 경험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할수록 시냅스가 많이 만들어지고 시냅스의 밀도가 높아지고 복잡해지면서 튼튼해진다. 이렇게 튼튼하게 형성된 시냅스는 우리의 뇌를 더욱 똑똑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양한 형태의 경험이란 하나의 감각만을 자극하는 경험이 아닌 오감을 활성화할 수 있는 경험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정보나 지식은 시각이나 청각에 치우쳐 있다. 그런데 시청각적 정보만을 제공하면 일부 뇌세포와 시냅스만 작동하고 나머지 시냅스는 소멸하게 마련이 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의 학습능력을 발달시키려면 시냅스의 형성과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자극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자극 중 최고는 단연 놀이다. 놀이는 아이에게 긍정적이고 건강한 자극을 준다. 혼자서 하는 놀이, 여럿이서 어울려 하는 놀이, 경쟁이 심한 놀이, 몸을 많이 쓰는 놀이, 상상력이 필요한 놀이 등등 이처럼 다양한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여러 긍정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놀이의 효과는 유대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0.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이제까지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억만장자의 30퍼센트가 유대인이며, 아이비리그 학생의 20퍼센트, 교수의 30퍼센트가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성공의 이유로 '잘 놀고 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와 풍토, 교육적 마인드를 든다. 종교의 영향이겠지만, 유대인은 주말에는 주중에 직장이나 학교에서 힘들게 진행했던 일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맛있고 건강에 좋은 식사를 하면서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는 것을 아주 중요한 생활원칙으로 여긴다. 이른바 안식일이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생후 3개월부터 자녀를 공동체 마을인 '키부츠'의 어린이 집에 보내는데, 여기서 아이들은 집 안에 굴러다니는 냄비, 그릇, 수저와 같은 생활용품을 이용해서 삼삼오오 놀이를 하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이러한 방식이 이어져서 자연스럽게 무엇인가를 함께하며 논다. 그렇게 노는 과정에서 창의적이고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지혜와 경제적 성공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뇌세포의 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똑똑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그 숫자가 비슷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뇌세포와 뇌세포 간의 연결, 바로 시냅스이다. 시냅스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을 통해 발달하고 형성된다. 그렇지만 외부자극이 없고 반복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시냅스는 소멸되고 만다. 그 소멸을 막는 중요한 수단이
바로 놀이인 것이다.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침부터 학교에 가서 방과 후에는 학원을 돌다가 저녁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다 잠이 든다. 힘든 수업, 어려운 테스트, 하기 싫은 숙제가 그 아이들의 유일무이한 외부자극일 것이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어쩌면 단순하게 연결된 시냅스들이 아이들의 뇌를 똑똑하게 만들어주고 학습능력을 향상시켜 줄까? 그저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건 아닐까?
어차피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라면 유치원, 초등학교 때는 즐겁게 놀고 생각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시냅스의 밀도를 높이고 튼튼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뇌를 똑똑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이런 생각의 와중에 안전요원의 휘슬소리와 함께 15분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뛰어왔고 바나나 우유와 과자를 냉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여기 끝날 때까지 놀 거예요.”
이 책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