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탐대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dac May 21. 2024

그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우암사적공원

은진 송씨 가문의 후손은 아니지만 우암사적공원에 가니 기분이 좋았다. 우암사적공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을 기리며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남간정사와 기국정, 송자대전의 목판, 유물관, 선생과 주자를 기리는 남간사 등이 있는 엄청 넓은 유적지다. 도심 속 공원 산책하는 기분으로 지난가을과 이번 봄에 두 번 방문했는데, 매번 사람이 많았다. 이번엔 특히 벚꽃이 한창이던 봄날의 휴일이라 꽃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 마루에 앉아 쉬는 사람, 어딘가로 움직이는 사람이 가득했는데, 공원이 넓어선지 답답하지 않고 기분 좋을 만큼 부산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휴일에 사정공원에 캠핑 의자를 들고 나갔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날씨 좋아, 경치 좋아, 휴일을 보내기 좋은 딱 좋은 장소야,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어! 이럴 수가. 내가 살았던 대도시 서울과 소도시 완주가 동시에 떠올랐다. 한강을 바라보며 잔디밭에 앉아 있으면 좋긴 좋은데 사람이 너무 많아 질릴 것 같았던 서울의 휴일, 멀리 보이는 산과 바로 옆에 잔잔히 흐르는 만경강이 좋은데 걷는 사람 한 명 만나기 힘든 완주의 휴일. 나는 둘 다 싫었다. 까다로운 사람 같으니라고. 그런데 대전은 딱 좋다. 적당한 규모와 편의시설, 심심하지 않을 만큼의 혼잡함. 대전천 유성천 갑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도 좋고, 한밭수목원, 서대전공원, 보문산 사정공원에 자리 깔고 누워서 햇볕을 쬐기도 좋다. 지난 주말엔 엑스포광장에서 타슈를 빌려 엑스포다리를 건너 한빛탑광장까지 슬렁슬렁 자전거 타고 놀았다. 효문화공원, 유림공원, 월평공원은 아직 안 가봤으니 시간 날 때 공원 하나씩 둘러봐야겠다. 


우암사적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왼편 남간정사 가는 쪽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아이와 함께 소풍 나온 무리, 누워서 편하게 쉬는 커플, 풍성한 도시락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여러 명의 성인 등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사람들이 보여 너무 재미있었다. 정말 이 공원을 즐기는 것 같아서 공원을 만든 사람도 아닌데 뿌듯했다. 공원을 만든 사람은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우리 고유의 전통 윤리를 배우는 교육장이 되기를 바랐을 테니 오히려 괘씸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흥행 성공 아닌가. 나무가 푸르고 꽃이 아름답고,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아이가 뛰어다니고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떠드는 공간이 정말 좋다. 우암 선생과 은진 송씨 조상님들도 분명 좋아하실 것이다. 좋은 일 하셨습니다.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명숙각, 인함각, 이직당으로는 올라오는 사람 수가 적어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다 올 수도 있다. 각각의 건물이 어떤 곳이었고,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안내문에 잘 설명되어 있긴 한데 한두 번 갔을 때는 읽을 엄두가 안 났다. 아니 지금 이렇게 좋은 꽃과 나무와 바람과 하늘이 있는데 이게 언제 지어졌고 뭐하던 곳인지 궁금할 리가. 마루에 앉아서 한참 산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다가 돌아왔다. 집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남겨놓은 후기나 대전시, 대전시 동구에서 소개한 관광자료를 보면서 아, 이런 곳이었군 조금 자세히 알게 되었다. 


우암사적공원 조성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글이 길고 가독성이 좋은 서체가 아니어서 선 자리에서 읽지는 못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너무 귀엽다. 소리 내 따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가 섞여 있어서 공감이 잘 되진 않지만 그 간극까지 문화재를 관람하는 낯선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재미있어서 옮겨 적어 본다.


우암사적공원 조성기

이 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강학하시던 곳이다. 선생은 흥농촌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이라 하였고 숙종구년 능인암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는 한편 학문을 대성하였고 효종의 뜻을 받들어 병자호란때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계획하였다. 선생의 도학과 절의 정신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선생이 수명하신후 후학들이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뜻에서 종회사를 세우고 주자 우암 수암 삼선생을 배향하였다 그후 종회사는 대원군때 훼철되고 일천구백삼십육년 사림과 후손이 남간사를 건립하여 우암 수암 석곡을 배향하고 제향을 받들어 왔다

나라는 되찾은 지 반세기 우리는 선생의 거룩한 정신을 배우며 제세안민의 도를 닦아야 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전시에서는 시민의 마음을 모아 이 유서깊은 곳에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그 맥을 이을 수 있는 명소로 보존코자 우암 사적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 대역사를 착수하였다 여기에는 칠개년에 걸쳐 총 이만여명의 인력이 참여하였고 수많은 중기가 투입되었으며 공사는 오개업체(미림 풍산 동일 진강 도성)가 맡이 시공하였다 조성 구역은 문화재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일만육천평으로 그 중 일만여평은 매입하였고 오천여평은 종손및 유회의 사용승낙을 받아 운평집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문화재위원 사계학자등 가계권위자의 고증과 자문을 받아 서원건물팔동(남간사 이직당 심결재 견뢰재 명숙각 인함각 내삼문 외삼문)과 유물전시관 장판각등을 건립하였고 소나무외 이십사종의 수목 일만삼천여본을 식재 조경공사를 완료하였다

이와 같은 사업은 일천구백구십일년 대전시에 의하여 계획 착공되었으며 그후 일천구백구십오년 칠월 일일 민선자치 시대를 맞이 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총공사비 일백십억원을 투입 일천구백구십칠년 십이월 삼실일일에 완공하였다

우암 사직공원이 우리 고유의 전통윤리를 바탕으로 대전 정신을 창조하는 역사의 참교육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의 도는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며 이 사업 역시 선생의 도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일천구백구십팔년 무인 사월 십육일



*매주 화요일 뉴스레터로 [소탐대전]을 받아보실 분은 여기에서 구독신청을 부탁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큰물이 그리울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