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방망이질 소리가 들린다. 우리 책방 앞에는 빨간 대문 집이 있다. 그 집에는 몇 명의 여성 룸메이트들이 사는 것 같다. 그들이 문 밖을 나와 카페트 먼지를 턴다. 야구 방망이 같은 걸로 마구 방망이질한다. 책방에 있다보면 만물트럭이 지나가고 마을버스와 오토바이가 주기적으로 비탈길을 오른다. 더러 빨간대문이 열리고 물을 한바가지 뿌린다거나, 카페트에 먼지를 턴다거나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다 손님이 들어오면 마치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을 방문한 사람을 본 것 마냥 조금 놀래면서 손님을 마주하는 것이다. 알바 경험을 떠올려보면 손님응대를 해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곳은 너무 편안한 내 공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들어오면 아직 긴장을 한다.
같은 책을 파는 공간이더라도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책을 파는 사람도 다르고, 책이 놓여진 자리와 함께 있는 가구들 전부 다르다. 그러니 같은 작가가 쓴 동일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더라도, 우리는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공간을 소비한다. 책방을 열고서도 전에 가던 책방에 다시 가고, 새로운 책방에 방문하고 여행에 가서 근처 책방을 찾아보는 건 각 서점들이 지닌 취향을 맛보고 싶어서다. 그러다보면 몰랐던 책을 알게 되고 작가를 만나고,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 ‘책’을 가격만 놓고 경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도서의 가격이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같다. 책방 고유의 향이 지켜지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어야 우리는 이런 저런 시도 끝에 살아남을 수 있다.
위치가 아예 같은 공간이어도 마찬가지다. 클래식책방은 이전에도 서실리라는 책이 열매를 맺는 책방이었다. 서실리를 아는 사람들은 이곳이 서실리와는 아주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한다. 3평도 되어보이지 않는 이 책방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클래식은 서실리가 쓰던 책장을 그대로 쓰고 있는데도 말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사람일 것이다. 파는 책도 다르다. 서실리는 헌책방이어서 책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나의 책방은 큐레이션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책이 그보다 적다. 인상 좋은 서실리 사장님이 과자나 차를 내어주셨다면 나는 가만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긴다. 누군가는 과자의 달콤함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무신경해도 오래동안 책을 둘러볼 수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같은 동네여도 그렇다. 서울 금호동의 동네책방은 클래식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두 곳 더 있다. 독립출판물을 주로 판매하는 프루스트의 서재와 그림책 전문 서점인 카모메책방, 여성주의 책방인 클래식책방 세 곳은 완전히 다른 책방이다. 이 세 책방에서 같은 책을 산 손님 세 명이 있다 해도 그들의 경험은 모두 다를 것이다. 책방을 열고서도 전에 가던 책방에 여전히 방문하는 이유이고, 동네책방을 사랑하는 이유다.
빨간 대문 사람들의 방망이질 소리를 무가지를 전달하러 온 래디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동아리 회원 분과 함께 들었다. 여성 서사 작품 속 여성 관계의 분석, 남성 중심 서사 작품 비판과 같은 이야기를 담은 <전지적 레즈비언 시점>을 2부 받았다. 먼저 온 회원 분은 내가 추천한 최승자의 시집을 사갔다. 어느 서점에서나 파는 그 시집을 사간 오늘의 손님이 한 분 늘었다. 어느 서점에도 없는 대화와 공기가 두둥실 떠올랐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