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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koni Oct 05. 2020

안에서 천대받는 당신의 남편

결혼할 땐 이런 질문을 해봐라늙어서 까지도 이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이 외에 다른 모든 건 일시적일 뿐이다.

니체 -



남자들에게 인정 욕구는 여자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아내 입장에서 당연해 보이는 직장인 으로써의 삶부터 형광등 갈아 끼우는 일까지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밖에서 겪는 수많은 모욕적인 언행들과 순간순간 일을 때려 치우고 싶었던 순간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며 버텨냈던 그 책임감의 원천에는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인정이 있다. 

그리고 그 인정은 사실상 대단한 표현력을 필요한 게 아니다. 출퇴근시 남편을 향한 따뜻한 배웅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일 열심히 해.’

‘수고해, 힘내.’

바쁜 아침 진수성찬을 갖다 바칠 필요도 없다. 그저 남자에게 이 집안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인지시키는 것만으로도 남편에게 엄청난 지지와 응원의 효과가 있다. 

나 어릴 적 우리 부모님은 정말 사소한 싸움이 시발점이 되어 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싸움이 길어지곤 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엄마보다 훨씬 소심한 성격의 전라도 출신 아빠는 엄마한테 그동안 서운했던 점을 털어놓곤 했었는데 단골 멘트가 바로 “당신이 집안의 가장인 나를 인정해 봤냐”는 하소연 이었다. 

중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좀 치사하다 싶은 하소연이었다.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 아빠는 뭐 저렇게 엄마랑 다투다가 불리해지면 아이처럼 ‘인정’을 요구하는지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당시의 부모님 나이에 가까워 지면서야 남자의 특성을 깨닫게 됐다. 52년생 아빠도, 83년생 남자들도 한결같이 인정을 요구했다.  

그만큼 남자에게는 계속적인 칭찬과 인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밖에서의 책임감과 먹고 살기 힘든 이 팍팍한 현실에 대해 계속 열심히 일해야 하는 동기부여를 인정받지 못한 남자들은 집안에서 인정하고 받쳐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정의 품이 아닌 밖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결과만 보았을 때는 절대적으로 옳지못한 행동임에는 분명하다.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하여 외도가 합리화 될 순 없다. 그러나 아내 역시 남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져버렸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그 지점을 수면위로 올리고 싶었다. 결과를 두고 상대를 비난하는 건 이혼 법정에서의 문제다. 그러나 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원인을 알아봄으로써 관계를 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 이혼 사유 중 하나인 ‘배우자가 악의로 일방을 유기한 때’ 라는 항목에서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버려두지는 않았겠지만 애정과 관심은 식은 지 오래고, 많은 남편들의 표현대로 단순히 돈 버는 기계 취급을 할 때 남편들은 외도를 꿈꾸고 심지어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아내들이여! 이혼 소송에서 승리하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첫 마음이 영원히 간직되도록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던 결혼 서약을 깨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가. 

판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상대의 배신에 대한 증거를 들이밀며 우위에 설 수 있을 뿐, 사실 사랑의 서약을 깼다는 의미에서는 별 차이 없는 배신이다. 

아내들이 아내로서의 모습을 당연히 잃고 아이의 엄마로만 살아갈 때 남자들은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끼며 절망하는 것이다. 



“애만 크면 이혼이다. 애만 없었으면 이혼이다”

형우는 아내와 의견이 갈라질 때마다 말끝마다 이혼을 들먹이는 아내의 협박에 진절 머리가 났다. 연애한지 3개월 만에 서둘러 올린 결혼 이었다. 신혼 초부터 서로 대화가 없었고 남들처럼 아주 신혼의 깨가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생겼고 형우의 어깨에도 그만큼의 책임감이 얹혀진 채 충실하고도 성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형우는 퇴근 후 집에 오면 보통 저녁시간을 훌쩍 넘겨 집에 오기 때문에 혼자서 밥을 차려 먹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차려 먹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밥과 국, 반찬 정도는 식탁 위에 차려 놓았고 형우가 밥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귀찮아하는 표정의 아내를 몇 번 대하고 언성이 높아진 뒤엔 형우도 더 이상 대화와 따뜻한 눈길이 오가는 저녁 식사를 포기했다. 

퇴근 후 현관으로 달려오는 아이들하고 삼십 분 가량 놀아준 뒤 야식에 가까운 늦은 저녁을 챙겨 먹으면서 휴대폰으로 혼자 유투브를 본다. 거실에 있는 아내를 흘끔 쳐다보면 아내 역시 TV를 틀어놓은 채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도 형우도 서로의 하루에 대해서 묻는 법이 없었다. 

형우가 설거지를 끝내 놓을 때쯤, 아내가 아이들을 목욕 시킨다며 화장실로 데리고 가고 형우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안방으로 들어온 아내의 팔을 스윽 만지자 아내가 귀찮다는 듯 소스라 치게 놀란다. 형우는 아내의 반응에 성추행자라도 된 것처럼 괜히 겸연쩍고 자존심이 상한다. 아내를 향해 슬쩍 싸인을 보낸다. 벌써 6개월 만에 요구하는 부부 관계이다. 아내는 기겁을 한다. 

“발정 났냐? 응?”

발정이라니...발정난 개 취급 하는 통에 의기소침해 진다. 벌써 몇 년 째 각방 생활은 익숙하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한 침대에서 같이 눈 뜬 적이 다섯 번도 되지 않는다. 

형우는 화가 나서 네가 이렇게 하면 바람 피울 수도 있다는 으름장을 놓고 아내는 귓등으로도듣지 않고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아이 방으로 옮겨간다. 

주말 오후, 회사 축구동호회 모임에 가기 위해서 주섬주섬 축구화를 챙기는 형우의 뒤통수에 아내의 폭언이 쏟아진다. 

“아이구, 인간아~주말에 애라도 좀 돌보지, 또 혼자 취미활동 한다고 반나절 이상 집을 비우냐? 진짜 당신은... 애만 없으면 이혼이야, 알아?”

형우는 정말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이렇게 사는 걸 기대하고 결혼한 게 아닌데 자꾸만 억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이 올라왔다. 

안방에 혼자 남아서 천장만 쳐다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형우는 너무 감정만 앞세워서 결혼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앞으로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렇게 집안에서는 ‘돈 버는 기계’로 살거나 아이들이 크면 아내 쪽에서 이혼을 요구할 것만 같다. 


위 결혼생활에 ‘아이’라는 매개체 외에 지속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가. 이미 생명을 잃은 이 부부생활에서 제 3자가 형우 앞에 나타난다면? 그 여인은 형우의 업무를 칭찬해 주고 형우와 눈을 마주치며 밥을 먹는다. 이 여자의 등장으로 인해서 많은 것이 변한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된다. 무기력 하게 시간을 죽이면서 살던 삶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찾아오게 된다. 불행한 줄도 모르고 지내던 루틴한 일상에 ‘맞아, 이렇게 사는 건 불행 한거야’ 라는 불행 프레임이 채워진다. 그렇다고 외도가 정당화 되지 않는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아내 역시 남편을 생계를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만 방치 했다는 양심 선언은 필요하다. 

만약 남편이 나를 외롭게 하는데 나를 여자로 봐주는 제 3의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나의 헤어스타일 변화를 알아봐주고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한다고 치자. 그 앞에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서 소위 ‘불륜’ 이라는 유책 배우자의 입장이 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때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무엇일까. 

소위 바람 피운 남편의 입장에서 뻔한 레파토리로 등장하는 ‘이미 깨진 가정이었다’ 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여성의 케이스도 있다. 


마지막 회사를 다니기 전 바짝 가까워진 여자 차장 A가 있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그녀는 연년생의 딸을 둔 워킹 맘이었는데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브랜드 마케팅을 책임지는 누가 봐도 멋진 여자였다.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은 듯이 보였던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사실 이혼 한지 3년째라고 털어놓았다. 잠깐 놀라긴 했지만 더 이상 이혼이 흠도 죄도 아닌 시대에 이혼이 뭐 대수냐며 애써 더욱 밝게 웃어 넘겼다. 그녀는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라며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았는데 그녀의 외도 경험이었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무능력 해진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하며 살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했다. 매달 생활비를 보내고 ‘돈 보냈다’는 카톡에 ‘ㅇㅇ’으로 답장하며 서로를 돌보듯 살다가 자기를 여자로 봐주는 직장 동료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도 유부남 이었다고 했다. 사회적 시선도, 체면도, 가족의 비난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보이지 않고 얼른 이혼하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예상대로 빤하게 흘러갔다. 아내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남편이 외도 증거를 잡았고, 소송을 했고, 결국 이혼을 했으며 ‘내연남’과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너진 자존감과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으로 꽤 오래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의 지인일 경우와 제 3자일 경우냐에 따라 판이하게 갈릴 수 밖에 없었다. ‘내로남불’은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내 지인의 외도는 그럴듯하고 이해되는 로맨스로, 나와 상관없는 남의 불륜에는 쉽게 판단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찾고 그 속에서 따뜻함과 친밀감을 찾게 되어 있다.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자라는 것처럼 일종의 자기 보호 기제가 발동 되는 것이다. 외부에서 유혹 당하더라도 내부가 단단하면 사람은 현재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포기하면서 까지 유혹 당하지 않는다. 망설인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위치와 시선, 부모님의 기대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눈망울을 기억한다. 누군가 나를 유혹했다는 사실, 주름지고 배나온 내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매력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잠깐 우쭐해 하며 그 자신감을 갖고 더 좋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끌고 나간다. 

남녀 할 것 없이 내가 이성에게 여전히 매력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내 삶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 인건 틀림없다. 

남편이 운동을 좋아한다면 인정하고 관심을 가져 주자. 하루 일과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 점심 메뉴를 물어보고 주말 나들이 계획을 함께 세워보자. 

실제로 이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집과 회사밖에 모르며 희생하고 있는 남편에게 겁주려는 듯 내뱉는 습관적인 단어 ‘이혼하고 싶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수시로 ‘이혼’ 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남자를 협박 하는 건 남자를 더욱 밖으로 돌게 만드는 아내의 ‘악수’ 일 뿐이다. 게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꿈에도 그리지 않았던 그 이혼을 상대 배우자에게 듣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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