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만 모른다
How marriage ruins a man! it is as demoralising as cigarettes, and far more expensive.
결혼이 얼마나 남자를 망치는가! 그것은 담배만큼이나 치명적이며 훨씬 더 비싼 댓가를 치른다.
- 오스카 와일드 -
유혹에 흔들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요새 남자들 참 힘들다. 먹고 사는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점점 남성의 지위가 무너져 내린다. 가장의 책임은 여전하지만 집안의 가장으로써 누렸던 권위는 자취를 감추고 의무는 늘어난다. 가사와 양육을 담당하는 주부의 노력은 예전과 달리 인정받고 경제적 가치를 수치화 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더 이상 외벌이 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가정을 부양하는 것도 당연하고 집안에서는 육아도 함께 책임져 줘야 ‘좋은 아빠’ ‘괜찮은 남편’ 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열심히 버는 건 나 하나인데, 돈은 모이지 않고 아내의 인정도 없다. 주말이 되어 밀린 잠을 실컷 자다가 TV를 틀면 슈퍼맨들이 등장한다. 함께 보던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한다.
“저 아빠들 좀 봐라.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체험활동 하는 거. 당신은 뭐야? 집에서 맨날 잠이나 자고. 내 주위에 독박 육아 하는 사람 나 하나야. 요새는 아빠들이 애들 교육에 얼마나 적극적인데.”
아내의 잔소리에 뭐라 대꾸하려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는다. 참고 말자. 뭐라고 대꾸 했다가는 결국 돈타령으로 끝나는 대화가 지겹다. 결국 분리수거를 핑계로 집 밖으로 나가서 분리수거함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운다. 일에 치이는 평일도 힘들고, 주말도 개운치 않다. 나는 10년이 넘는 회사생활을 통해 프로 이직러로 직장을 계속 바꾸며 다양한 시절 인연들을 알게 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내가 직장에서 만난 모든 3040의 남자들은 참 힘겹게 가까스로 책임감과 의무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지난 밤 회식으로 쓰라린 속을 익일 점심 부대찌개로 해장하며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이 없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욜로(YOLO) 의 삶을 살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나는 결혼은 선택이며 비혼을 선택하고 자신을 위해 투자하겠다며 취미, 여행, 자기계발에 에너지를 쏟아붇는 미혼 남자들을 부러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혼 남성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시지푸스의 바위를 들고 있는 남자들,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의무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남자들은 과거 남아선호 사상 시대에 남자라는 존재만으로도 인정받았던 다시 못 올 시대를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남자들에게 책임져야 하는 부양가족이라는 존재는 남자가 사는 존재의 이유이자 원동력인 동시에 버거움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업주부의 삶이 마냥 편하다고 폄하하는 건 아니다. 브레이크 타임이라고는 없는 육아와 티 안 나는 집안일로 하루는 보낸다는 건 생각보다 아내의 자존감 하락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업주부인 아내들이 모르는 남편들의 치열한 ‘버팀의 일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보이지 않는 커리어의 ‘유리 천장’ 때문에 회사 내에 여성 임원이 없고, 여성 인력 자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끝까지 버텨내는 이들이 바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바로 가족이다.
고용시정은 유연성이라는 말은 조직의 필요에 따라 해고할 수 있다는 뜻을 어여쁘게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많은 회사들이 채택하고 있는 만 58세의 정년까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30대 후반부터는 남녀 직장인 모두 버티는 걸 미덕인 게 회사원들의 삶이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고 위에서는 언제라도 퇴사의 압박을 받을 수 있는 30대 후반에서 40대 남성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눈물겹게 치열하다. 남편이니까, 아빠니까 저 굴욕을 참으면서 회사에 다니는 것 같아서 안쓰러울 정도다.
건전한 여가의 대명사인 스포츠로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를 풀어 보려고 해도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담뱃값도 아내 눈치를 봐야 하는데 주말마다 야구나 축구 동호회를 한다고 한들 비난과 한숨이 섞인 짜증을 감당해야 한다. 소위 회사에서 전투를 치르고 집에 온 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마저 말싸움을 감당할 수 없다. 전의를 상실한다. 안팎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좀비처럼 살아간다. 무엇을 위해서? 다 처자식을 위해서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나만 그렇게 아니라 김과장도 박부장도 다 비슷하게 ‘좀비가장’이 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 줄 뿐이다.
맞벌이 여성의 경우는 전업주부 보다 남편의 일에 대한 이해도 자체는 높지만 언제든 남편을 믿고 그만 둘 수 있다는 생각에 배우자나 아이에 대한 단독 부양 의무는 크지 않다. 그것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는 사회가 남자 배우자와 여자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많은 가정에서 ‘남자’가 ‘여자’와 ‘자식’을 부양하는 구조다. 여전히 남녀에 대한 성차이와 성차별은 존재하지만 남자입장에서는 역차별을 당한다고 느낄만한 일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즉 사회적으로 입지는 좁아졌지만 집 안에서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부양 의무는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서 남편이 ‘중년의 위기’를 잘못된 방향, 즉 외도를 통해 푸는 어리석인 행동으로 표출하여 가장 파탄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남편을 제대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다음은 내가 인사팀 근무할 때 알게 된 만난 아주 평범한 결혼 10년차 남성 직장인의 이야기다. 회사 휴게실에서 간간히 마주칠 때마다 그에게 받았던 인상 중 하나는 참으로 열심히 사는 동료라는 점이었다. 사회의 시작을 직원들을 끊임없이 대면해야 하는 인사팀에서 시작하다 보니 사람을 관찰하고 성격을 짐작해보는 오랜 습관이 있었다. 그는 회사에 가장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는 직원 중 한 명 이었는데 그래서 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연히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을 마무리 하며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회사 빌딩을 빠져나오다가 회사 근처 고깃집 앞에서 가로수 하나를 붙잡고 열심히 토하던 그를 보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그리고 등을 보이며 속을 게워내더니 숙취해소제 하나를 까먹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영업팀들이 거래처 직원들을 앞에 두고 맥주잔을 높이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아이고 남자들 저렇게 먹고 살기 힘들구나.’
뭐가 봐서는 안되는 장면을 본 사람처럼 나는 서둘러 외면한 채 막차를 탔다. 나는 1980년대에 태어나서 적어도 눈에 띄는 성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세대로 살아왔다. 영화로도 리메이크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으며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82년생 김철수도 할 말은 있을 것이었다. 많은 80년대생은 성차별이 없는 만큼, 성차이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취업전선에서도 남자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업도 여자들이 쉽게 도전하고 문을 두드려서 인정 받고 승진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 많던 여자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사회에서 사라졌다. ‘여자’여서 잘린 게 아니라 ‘여자’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직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왜 여성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드는지 안다. 바로 버티는 건 남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술, 접대, 영업, 군대문화, 갈굼을 버티는 건 아무래도 남자 몫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살아남는 여자가 돋보일만큼...
우리나라에서 술 없는 영업이란 있을 수가 없고, 그래서 영업직에서는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 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저 직원의 아내가 남편이 밖에서 어떻게 돈을 벌어서 집에 갖다 주는 지 안다면... 정말 남편을 측은지심으로 보면서 잘해 주지 않을까? 그가 정말 집에서 사랑 받고 인정 받는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훗날 아는 직원들을 통해 건너 들은 그의 결혼생활은 정말 불행해 보였고 몇 년이 더 지나서 별거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기태는 아침 6시 30분이면 눈을 뜬다. 멀리 은평구에서 강남까지 가려면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상에서 씻고 출근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다. 아침 식사는 따로 없다. 올해 6살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그러니까 6년 째 아내는 내가 출근 할 때까지 아이방에서 나오지 않고 인기척이 없다. 육아와 집안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 하겠다는게 아내의 이유이다. 익숙한 듯 우유 한 잔 챙겨먹고 (그것마저도 없을 땐 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한다) 서둘러 지하철로 이동한다.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며 회사에 도착한 후 진짜 하루가 시작된다. 치과 기공 회사 영업 과장인 기태는 오늘은 회사에 주간 세일즈 미팅이 있어서 오전에 사무실로 들어왔지만 보통은 아침에 치과를 돌면서 기존 병원을 관리하고 새로운 영업 채널을 뚫곤 한다.
한 때는 성과가 좋아서 보너스도 두둑하게 탔었는데 최근에 경쟁 업체가 급성장 하면서 영업이 많이 어려워 졌다.
회의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 빈 속에 담배만 피워댔더니 심한 공복감에 속쓰림이 올라온다. 오늘은 지점장에게 후배들 보는 앞에서 쌍욕을 들었다. 두 달 연속 영업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목구멍까지 “그만 두겠습니다” 라는 말이 올라왔으나 전세대출금 이자 납입 예정 문자를 확인 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다시 한번 이를 꽉 깨물며 아내와 아이를 생각한다. 버티는 삶...대한민국 40대 가장의 현실이다.
회의가 끝났으니 근처에서 서둘러 이른 점심으로 국밥을 한그릇 먹고 병원을 돌면서 영업을 시작한다. 열심히 눈도장을 찍고 다시 샘플을 들고 신규 거래처를 뚫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입구에서 간호사들이 잡상인 취급을 한다. 연신 굽신거리며 명함과 샘플을 건네고 커피까지 건네면서 의사 선생님께 인사만 하겠다고 사정한다. 어느덧 시간은 어둑해지고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다. 실적은 안 좋아도 회식자리 에서만큼은 지점장님 비위를 맞추느라 넥타이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계속 술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자정이 될 때까지 녹초가 되어 집에 온 기태...이미 불 꺼진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적어도 15년은 이렇게 버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실제 사례를 예로 든 가상의 인물 기태는 하는 일만 다를 뿐, 많은 가장들의 하루 일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자들이 입버릇처럼 해대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라는 말은 단순히 주사나 허세가 아니다.
남편 노릇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도,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시대 착오 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부부관계는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등하게 서로를 대우해야 제대로 관계가 성립이 될 수 있다. 다만, 허구한 날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며 잔소리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하루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수년 전 외국계 제약회사 인사팀에서 근무할 때, 사내에서 실시한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로 ‘1일 영업사원 체험’ 이벤트가 있었다. 회사의 캐쉬 카우(Cash Cow) 인 영업직을 체험해 봄으로서 내근직이 체험하는 외근직의 고충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였다.
반나절 정도 동료를 따라 다니면서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남편이 이렇게 돈 버는 걸 알았다면 남편의 월급으로 사 먹는 커피 한잔도 소중하겠다. 나중에 결혼하면 직장 그만두고 남편 돈으로 문화센터나 다니려고 했었는데...음...안되겠다.’
동료 직장 여성들은 알지만 전업주부들은 모르는 당신 남편의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치열하고 처량하다. 내가 아는 한 남성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시간이 화장실에서 똥싸면서 잠깐 휴대폰 게임을 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점점 남성들은 밖에서 대접받을 곳이 없다.
당신의 남편이 얼마나 밖에서 처량하게 흔들리고 있는지 아내인 당신만 모른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