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남자의 마음이 근심이나 고달픔으로 우울해졌을 때 그 순간 여성이 나타나게 되면 그 즉시로 남자의 마음속의 안개는 맑게 걷히게 된다.
- 존 가이 -
불륜, 외도, 간통한 남자를 두고 감정의 결핍이나 인정욕구, 혹은 배우자와의 성 불만족에서 오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단순히 설명하기에는 남녀가 처한 각자의 상황과 사랑과 연애라는 감정의 파도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둘의 소중한 자식을 멀쩡히 두고 욕정에 눈이 물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불륜도 있지만 너무 늦게 만난 사랑인 경우도 있다.
불륜은 가정을 단 번에 파괴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배신이다. 권투로 치면 KO승으로 끝나는 라운드처럼 한 번의 펀치로 상대방을 링 위로 쓸어뜨리는 셈이다. 그러나 한 방의 주먹이 없더라도 상대 선수가 계속 타격하는 잽을 맞다 보면 피멍과 입술이 터지고 콧뼈가 부러지며 판정패를 당할 수 있다.
결혼 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노골적인 배신은 없었다고 해도 배우자에 대한 무관심과 재산 은닉 등이 이루어 지고 있다면 이미 끝난 결혼 이다. 결혼 서약에는 서로에 대한 배타적 성관계를 맺겠다는 암묵적 합의 만큼이나 서로를 사랑으로 지켜내겠다, 서로에게 솔직하겠다, 라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행하는 많은 약속이 담겨 있다.
불륜. 결코 해서는 저질러서는 안되는 이 일을 두고 이 세상 온갖 윤리과 도덕 그리고 성경을 들먹이며 ‘자, 보라구! 어디를 봐도 간음하지 말라잖아. 간통하지마. 죄악이야. 불륜은 파멸이야’ 를 외쳐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거짓말이 나쁜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뒷담화가 옳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남의 말 안하고 하는 사람이 없다. 마찬가지로 불륜이라는 행위로 배우자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결혼생활을 1순위로 위협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한민국 ‘불륜’공화국 이라는 말이 인터넷 카페의 글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 하고, 기혼 남녀가 배우자 몰래 애인을 두고 있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게 실상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불륜은 결혼생활을 너무 쉽게 깰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핵 폭탄급 배신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인간의 평균 수명이 인류 역사상 가장 길어진 시대와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시대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곁에서 지켜주겠다는 서약만큼 공허한 게 없다. 소확행, 욜로(You Only Live Once), 휘게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등등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신조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받아들여 지는 이유도 수명 연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어느 세대보다 빠르게 은퇴하고 은퇴 이후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하는 백세시대에 살고 있다. 길어진 수명에 발맞춰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삶의 의미를 계속 자문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결혼이란 행복한 연애에 법적 구속력과 책임감, 안정성, 소속감을 얻고자 서로간의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연애보다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맺어진 두 관계는 다른 한쪽에 의해서 충분히 파기 될 수 있는 계약일 뿐이다. ‘가족인데 뭐 어쩌겠어’ 라며 ‘가족이니까 이해해야지’ 라는 수동적 의미의 사랑을 바닥에 깔고 행해지는 서로에 대한 수많은 무관심과 무시로는 더 이상 가족은 지탱 될 수가 없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한국에서도 법률혼보다 사실혼이 늘어날 것이란 목소리도 제법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되고 유리한 증거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이 이혼을 망설이는 이유는 경제적 능력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 이 두 가지 이유로 압축될 수 있다. 이유야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떤 이유가 됐든지 당장 이혼할 능력과 자신이 없고 남편이 최소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아이의 아빠로써의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면 아내로써의 역할을 등한시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는 외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각서 따위를 받는 것으로는 결혼생활이 회복되지 않는다. 또한 남편의 외도로 분노와 한을 가슴에 품고 ‘아이만 크면 이혼하겠다’라고 마음 먹는 것 또한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를 핑계 삼아서 당장 이혼 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 위안 일 뿐이다. 모두를 위한 현명한 방법은 남편이 왜 가정을 져버리고 불륜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해하고 거기서 부부상담 등을 통해 가족의 재탄생에 힘쓰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해가 없는 일방적인 비난과 조소와 경멸은 이혼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이혼 후에도 행복할 수 없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피가 흐르는 아이의 존재의 유무는 이혼의 결정에 큰 숙제와 고민을 안길지언정 두 부부 사이에 제 3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막아주는 방패가 되지는 못한다. 또한 아이 때문에 부부관계를 억지로 버텨낸다 한들, 그 사실도 애석한 일이다. 자식이라는 존재에 앞서서 먼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바로 부부관계 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 결혼에 어떠한 유혹이 와도 남편이 버텨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아무리 자식이라 한들, 나의 행복을 저당 잡히면서 까지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 또한 불행과 한(恨)의 되물림일 뿐 정답이 아니다.
이미 안으로 깨진 가정생활을 두고 외부의 유혹을 받게 된 남자들은 본인이 경제력이 확보 된 상황에서 아이의 존재가 이혼 결정을 망설이게 할 만큼 크지는 않다. 오히려 외부여인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불행하였는지 반추하게 되고 앞으로 남은 40여년의 세월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는 쪽에 한 가닥의 희망을 잡는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꽃잎의 방향을 틀 듯이 남편에게는 새로운 여자가 햇빛이 되는 것이다. 그늘 속에 있던 남자는 그늘의 서늘함과 축축함, 그리고 곰팡이 냄새를 자각하지 못한다. 태양의 따스함을 알아버린 남자는 다시는 태양을 알지 못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다.
요섭은 이혼한 지 막 1년의 시간을 넘기며 1년 동안 이혼 소송과 별거로 인한 이사, 이직을 경험 한 채 이제 막 변화된 자신의 현실에 가까스로 적응하는 중이었다. 거래처에서 만난 여자에게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었다가 아내에게 외도의 정항이 발각 됐고 이혼 소송과 취하를 번복하다가 결국 감정의 골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했다.
현재는 대학가의 6평짜리 원룸에 살며 출퇴근을 하고 한 달에 두 번 아이들을 면접교섭 하면서 이혼으로 생긴 채무를 부지런히 갚고 있다.
처음에 요섭은 본인의 외도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 깊이 반성 하는 듯 보였다. 아내가 처가식구들과 요섭의 부모님한테 까지 요섭의 외도를 알린 덕분에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죄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요섭도 아내의 괴롭힘에 지쳐갔다. 남은 결혼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와서 차라리 이혼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일 다툼이 지겨워진 요섭은 처음에 무조건 잘못을 빌었던 입장과는 달리 아내가 외롭게 했기 때문에 외도를 할 수 밖에 없다며 외도를 합리화 하기 시작했다. 요섭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부끄러운 아빠라는 아내와 처가의 비난을 견뎌냈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비난과 책임은 아내가 계속해서 자기를 가정파괴범으로 몰아가고 장인 장모의 비난이 이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괜찮아지면 다음날 다시 아내가 갑작스러운 비난을 쏟아내는 식으로 가정생활을 유지했다.
가뜩이나 대화하지 않았던 부부는 아이들 앞에서 마저 폭언을 하며 싸우는 장면을 연출했고 더 이상 집안에서 요섭이 편하게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외도 전부터 무소통의 부부 였지만 외도 이후에는 정확히 각방 생활을 했으며 반 년 쯤 시간이 지나서 아내와 잘해 보기 위해 다시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으나 아내는 냉담했다. 마치 아이들과 경제적 여건을 때문에 억지로 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듯한 아내의 표정과 말투에서 절망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요섭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끈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혼 절차를 마치고 나자 재산과 머리숱 모두 반 토막이 되었다. 요섭이 다른 여자에게 느낀 감정은 성욕도 욕정도 아닌 이해와 인정, 관심과 사랑이었다.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가정도 지켜내지 못한 패배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우울증 마저 앓고 있다.
요섭은 지금 와서는 왜 맞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만 하면서 스스로 끝낼 수 없는 인생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위의 사례는 불륜을 저지른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가족해체의 모습이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당한 배신감이라는 감정이 결코 쉽게 잊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정말로 가정을 지킬 생각이 있었다면 풀리지 않는 분노로 상대방을 향해 계속되는 분노를 표출할 게 아니라 상담 및 심리 치료를 통해 바닥으로 떨어진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 남편이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인정욕구를 무시해 왔다는 것에 대한 자기반성 없는 관계 회복이 있을 수 없다. 즉, 상처치유의 골든 타임을 놓쳐 버린 채 올라오는 울화와 분노를 상대방에게 터뜨리는 화풀이만 했다는 점이 결국 요섭 부부를 이혼으로 몰아갔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어 이혼이냐 아니냐를 두고 고민하는 아내들은 남편을 잠정적 ‘잠자리’에 환장한 동물이거나 윤리도 도덕도 모르는 파렴치한 이라고 욕하고 치부한다. 그리고 자기의 남편과 관계한 여자를 두고 여자의 집안까지 싸잡아 가면서 욕을 한다. 가정교육을 탓하며 인신공격도 일삼는다.
상처받은 아내의 궤변 중 하나가 왜 더럽게 불륜을 하느냐는 것이다. 깔끔히 헤어지고 이혼하면 될 문제라며 남편을 놓치도 못하면서 정조를 지키지 못한 남편과 그 ‘내 남자의 여자’를 향해 동서고금의 모든 도덕잣대를 들이밀어서 비난을 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짐승만도 못한 ‘성욕’을 문제 삼아 맹비난 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만족이다. 제 3의 여인에 대한 질투이자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으니 나를 놓아달라고 말할 때, 깔끔히 갈라 설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미국처럼 이혼 파탄주의가 아니라 유책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 한다고 한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미 안으로는 파탄 났지만 겉으로는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이어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남자에게 찾아온 뒤늦은 사랑, 과연 나는 쿨하게 인정해 줄 것인가? 여자가 그렇게 좋으면 이혼하고 만나면 되지 왜 정리하지 못하고 바람 피우냐는 말은 여자들의 궤변에 불과하다.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는 대사중 하나로 “누구 좋으라고 이혼해주냐”는 말은 기혼 여성 사이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다. 결국 불행한 결혼생활의 한 탈출구로 발생된 불륜 이라는 행위에 대한 책임은 이혼 법정에서는 온전히 남편의 책임이 되고 만다.
서류 정리를 끝내고 조용히 앉아서 결혼생활을 돌이켜 보자. 이 남자와 왜 결혼했는지, 결혼 초반에 내가 얼마나 사랑을 쏟고 관심을 쏟다가 싸늘하게 식어 갔는지 살펴보자. 지난 관계에 대한 반성 없이는 이혼 이후에 살아가야 모래알처럼 많은 날들에 찾아올 연애도, 재혼도 없다.
정훈은 회사 물류팀에서 일하고 있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대학에서 만난 학교 후배와 결혼한 지 막 10여년이 막 지났다. 전업주부인 아내와 7살 4살의 아들, 딸을 두고 있는 정훈이네 가족은 남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이다.
그러나 정훈과 아내는 집에서 서 너 마디 이상 나눠 본 적이 없는 무소통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만약 아이가 없었다면 집에서는 그 어떤 큰소리로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조용한 가족인 셈이다. 정훈은 첫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아내와 단 둘이 잠을 자 본 적이 없으며 둘째 딸 아이의 출산 이후로는 아내와 부부관계를 한 적이 없다. 아내의 적극거부 거부로 정훈도 의기소침 해져서 그 이후로는 아내를 봐도 그 어떤 성적인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몇 번 안마시술소의 불법적인 성행위를 경험한 적도 있지만 아내가 모르는 비상금도 없을뿐더러 성행위 이후의 자괴감이 심해서 그 짓도 몇 번 하다가 말았다. 결혼 초반부터 아내와 성격 및 성적인 부분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죽을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혼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가족이랑 어떻게 입을 맞추냐는 식의 동성 친구끼리의 농담에 동의하며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욕정을 누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모든 결혼생활이 나와는 대동소이 하려니, 이것이 인생이려니 스스로 위로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부터는 부모님께 명절마다 손주를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웬지 할 일을 다 한 느낌, 효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종종 남자로써의 삶은 끝인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는 소위 쎄빠지게 일하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나의 편인 가족들의 인정과 사랑이 없었다. 간혹 가다가 아내가 정훈의 부모님에 대한 불만 및 나중에 부모님 모시게 되는 상황이 오면 바로 이혼할거라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도 혹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남성성을 죽이고 아빠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짐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물류팀에 새로 입사하게 된 서희 대리와 가까워 졌다. 처음에는 그저 동료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날 회사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서희 대리가 결혼 이상형으로 정훈을 꼽자 정훈은 당황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자기를 인정해 주는 여자랑 결혼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아내는 자신을 거들떠 봐주지 않는데, 누군가에게 남자로 느껴진다는 생각에 생기가 솟았다. 출근 하면서 그녀를 보는 게 좋았다. 감히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엄연히 정훈은 결혼을 했고, 그녀는 혼기가 꽉 찬 미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좀 더 가까워지고 단 둘이 저녁을 먹으면서 서희는 인생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정훈의 일상을 묻곤 했다. 팀 회식이 있던 다음 날, 출근한 정훈에게 홍삼 음료를 건네는 서희에게 감동하여 가슴이 뜨거워졌다.
심야 택시를 타고 왔다며 악다구니를 쓰며 택시비 만큼 다음 달 용돈을 차감하겠다는 아내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가장으로써의 자존심 맘저 무너져 내렸다.
너무 늦게 만난 서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 오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쯤 정훈이 서희에게 말했다.
“오빠가 다 버리고 갈게, 오빠 믿고 가자.”
정훈은 확고했고 서희 역시 그의 분명한 입장정리에 믿음이 갔다. 정훈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 했으나 언제라도 이혼해 줄 것처럼 하던 아내는 돌연 이혼은 안된다며 완고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말할까 했지만 상처를 주면서 아내와 이혼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정훈의 이혼요구를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흥신소에 의뢰에 정훈의 뒷조사를 했고 마침내 정훈이 서희와 함께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서희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있는 사진을 손에 넣었다.
아내는 가정을 지키고 싶다며 이혼에 대해서 완강한 모습을 보였고 대신 서희를 향해 상간녀 소송을 걸었다.
제 3자의 시각으로 보면 정훈은 안팎으로 상처 주는 불륜 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서 빠른 시일 내에 기존의 부부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불륜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여자들이 김희애에 열광하는 이유, 그리고 이태오역의 박해준이 비난 받는 이유는 사실 어찌 보면 여자 둘을 모두 기만한 행동 때문일 것이다. 가정 있는 남자를 만나고, 아내와 헤어질거라는 말만 믿은 채 스스로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상간녀가 어리석고 멍청했다면 남편 이태오는 두 여자를 놓지 못하며 오래도록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여자 모두를 망가뜨렸다는 점이 아마 정훈과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일 것이다.
드라마 에서와는 달리 정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아내는 부부 관계를 정리해 주지 않았고 대신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공격했다. 덕분에 가정은 지켜졌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유지되는, 서로간의 애정이 없는 죽은 가정의 모습이다. 만약 아내가 이미 끝난 부부관계임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가정을 깰 수 없었다는 이유를 댄다면 이미 아이들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자신들의 존재로 인해 부모가 헤어지지 못하고 억지로 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인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건 서로 사랑하는 부모를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양 쪽의 무한 사랑과 지지를 받고 큰 아이들의 자아는 단단하고 건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의 결정으로 이혼을 선택한다고 해도 이 이혼의 결정이 자녀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니 부모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가 받았던 상처와 충격은 부모의 이혼 이후 양육방식에 따라서 충분히 극복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단언한다. 이혼 가정보다 더 최악인 경우가 바로 미워하면서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부모와 함께 성장하는 경우이다. 아이는 존재가 부정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주 어릴 때는 깨닫지 못했던, 억눌린 억울함이 사춘기를 겪으며 부모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표출 되는 것이다. 나 때문에 억지로 이혼을 못하거나 늦추며 살아가는 부모를 보면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며 이는 성인이 된 이후까지 자존감에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5년 전, 아일랜드의 한 지방에서 아이리쉬 스타트업 회사에서 한국지역 담당 매니저로 약 8개월간 일한 경험이 있다. 많게는 약 10살 정도 차이나는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호주, 일본, 대만, 영국출신의 친구들과 말 그대로 동고동락 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는 관계도 이다 보니 서로의 사생활 역시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2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었다고 했다.
“이혼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라는 나의 입장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건 그들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헤어지는 게 맞고, 엄마 아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맞다며 내가 듣기에는 다소 생경한 엄마의 남자친구, 그리고 재혼한 아빠와 새엄마의 자식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이었다. 이혼율은 계속 높아지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생겨나고 있는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이혼이라면 서로에 대한 미움과 감정소모로 바닥을 보이지 않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이별하는 이들의 논리에 꽤 설득력이 있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불륜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연출한 정환의 집을 다시 들여다 보자. 결국 엎질러진 가정에서 무늬만 유지되고 있는 이 결혼생활의 끝은 해로일까 아니면 10년 쯤 뒤로 이혼을 연기하는 것일까?
만약 아내가 평소에 조금이라도 더 결혼 서약의 의무에 충실했다면 남편 정환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혼소송에서 이겼어도 이미 부부관계가 깨지고 아이들이 한쪽 부모를 잃는 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패자일 수 밖에 없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불륜의 끝은 대개는 파멸이다. 또한 파멸로 끝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타인의 희생을 담보 삼아 단 둘을 위해 피어나는 로맨스 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드물게 ‘그들은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결말짓는 진짜 사랑이야기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성숙한 어른들은 자기의 선택에서 오는 기회비용을 책임 질 줄 알기 때문이다.
평균 수명은 길어지고 사회는 점점 개인화 되면서 부양, 효, 의무, 책임감 이라는 가치보다 내 개인의 행복이 어느때보다 커지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행복하지 않다면 이혼도 방법이다. 그리고 불륜으로 인해 이혼 했더라도, 그 기회비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성인이면 또 다시 찾은 제 2의 인생에서 사랑을 꽃피울 수 있다.
누구나 인생에 두 번째 기회란 부여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