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정사를 갖는 것은 도박장에서 그 동안 저축한 돈을 몽땅 날려 버리는 것과 같다.
가진 돈을 몽땅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존 그레이
결혼의 동기는 커플마다 각양각색이다. 겉으로야 쉽게 ‘사랑해서’ 라고 말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관습적으로 갖다 붙인다. 여기서 잠깐!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죽도록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연애는 있을 지언 정, 우리는 보통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 조건 없이 떡볶이만 먹으면서도 상대와 결혼을 꿈꿀 수 있는 나이는 이십대 중반을 넘기지 못한다. 결혼 연령이 자꾸만 늦춰지는 게 그 원인이다. 이십대 후반에서 서른을 넘기다 보면 나도, 상대도 서로 무시할 수 없는 게 바로 상대의 조건이다. 조건 이라는 게 대단히 거창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사람과 혼인을 하고 함께 살만한 상대인가 점검하는 최소한의 ‘선’이라고 보면 된다.
상대의 외모가 좋았든 집안이 좋았든 능력에 사로 잡혔든, 상대가 결혼 배우자로 괜찮고 그 괜찮은 상대가 나를 또 ‘사랑해 주고’ 양가의 축복 속에서 무리 없이 결혼 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역시 우린 운명이야’를 외치며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순탄하다. 꼭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결혼생활이 순탄한 것도 아니고 조건을 따진 결혼생활이 사랑 없이 무미건조 한 것만 아니라는 걸 우리 주변의 직/간접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사랑의 감정에만 도취해서 결혼 이후 일상을 위협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가 예상치 못한 고된 현실에 서로를 원수 삼는 경우가 흔하다. 노후 준비가 되지 않은 양가 부모의 경제적인 부담 및 간섭, 빠듯한 살림살이 등 크고 작은 현실적인 문제 앞에 서로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겠노라는 혼인 서약은 증발된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콩닥이던 심장이 잠잠하게 사그라들고, 현실이라는 일상의 루틴이 찾아오고 배우자에게 ‘의무’라는 짐을 씌우기 시작한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를 따져 물을 시간도 없이 아이가 태어나면 또 다른 차원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이로 인해서 너무 행복하지만 행복만큼이나 고단함과 서로에 대한 실망, 배신감의 강도가 깊어진다.
이혼 위기에 놓인 많은 남성들은 공감할 것이다. 아이는 축복이지만 아내가 아이를 출산한 이후 모든 생활이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아내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부부관계를 거부했다고. 6개월에 한 번씩이라도 겨우 이루어지던 부부관계는 1년에 한 번도 겨우 구걸하듯 이루어질 때쯤 내가 왜 사는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생각 끝에 조용히 좌절한다.
불평불만은 심화되지만 이 문제로 아내와 싸울 수 조차 없다. 우리의 아이, 나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케어 하느라 심신이 지치고 피로함을 느끼는데 내가 원하는 게 그깟 성관계 라는 데에서 오는 자기반성 역시 동시에 올라오기 때문이다.
아침밥 까지는 아니어도 출근길에 ‘우유 한 잔’의 배웅없이 잠을 자는 아내에게 불만이 쌓인다. 퇴근 후에는 아내의 잔소리와 짜증을 받아주다가 아이를 핑계로 각방을 쓴다. 외롭다. 섹스리스의 기간이 3개월, 반 년이 넘어가면서 분노와 체념, 그리고 결혼생활의 후회가 찾아온다.
물론 아내의 입장은 또 다르다. 워킹맘이 겪는 일과 가사노동에 대한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하루 종일 집에서 집안 일 하며 애와 씨름하는 전업주부의 삶 역시 결코 밖에 나가 돈 버는 일보다 수월하거나 여유롭지 않다. 돈 버는 남편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된 노동이다. 게다가 여자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경력 단절에서 오는 무기력감과 거기에 맞서는 모성애 라는 감정의 충돌에 당황한다. 아이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아이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져 버린 사회적 입지 및 건강과 몸매에 우울이 찾아온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호르몬 변화를 겪으면서 예민하고 날카로워 진다.
출산 전후로 여자들이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데 물리적인 도움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계속 잠자리를 요구하는 남편에게 오만정이 떨어진다. 계속 뒤척이는 신생아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에 밝아오는 새벽에 겨우 잠들었는데 아침 타령하는 남편이 한심하다. TV에 나오는 슈퍼맨과 같은 남편을 쳐다보다가 옆에서 배를 내민 채 코골며 낮잠을 자는 남편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결혼을 잘못 한 것 같은 생각이 올라온다.
바로 이 지점이다. 별로 심각할 것 없는 일상의 아주 작은 불만족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한다. 부부간의 사랑이 식어 가는 건 별 대수로운 게 아니다. 쓰레기 봉투 조차 제대로 버려주지 않는 무심한 남편, 가장으로써의 역할로 최선을 다해 지친 몸으로 퇴근한 사람에게 짜증을 쏟아봇는 이기적인 아내, 그렇게 부부의 정이 점점 소원해지며 어느덧 동상이몽을 꿈꾸게 된다. ‘아이’라는 매개체가 부부를 가족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의미가 되고, 불통의 시간이 몇 개월에서 몇 년 째 이어지는 그 시기에 다른 이성의 등장은 비닐막 처럼 얇아진 부부관계를 단숨에 뚫어버린다.
그리고 법정에서 원고의 입장이 된 아내들은 외친다.
“나는 현모양처 였을 뿐이에요. 열심히 살림하고 애를 키우면서 나를 희생하는 동안 저 인간이 밖에서 놀아난 거라구요!”
아내에게 이혼 소송을 당한 남자들도 할 말은 있다.
“배신? 외도만 안했으면 현모양처 인가요? 부부사이에 성관계를 할 의무와 권리도 있는거잖아요. 우리 부부는 수 년간 섹스리스 였고, 쇼윈도 부부였습니다. 제가 외도한 건 잘못이지만 외도하게끔 만든건 바로 아내라구요!”
여자의 말도 맞고 남자의 말에도 공감이 간다. 아무리 외도는 배우자를 향한 치명적인 배신이라고 해도 ‘외도’라는 행위 하나만을 두고 피해자, 가해자로 나누기에는 너무 많은 부부생활의 이면들이 있다.
법정에서의 시비를 가리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원고와 피고의 결혼생활이다. 외도는 명백한 결혼의 파탄 행위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명백히 외도를 저지를 자에게 유책 사유를 묻게 된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외도를 저지르지 않은 자의 ‘배신’행위도 있다. 사랑하고 헌신하겠노라고 서약해 놓고 상대 배우자를 무시하고 짜증내며 폭언을 일삼았다면? 그 역시 법에 저촉되지 않은 배신이다. 남편에게 경제적인 부양의 책임을 씌우고 아내로서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았던 수년의 세월은 외도 못지 않은 배신이고 기만 행위이다.
이렇듯 현모양처를 주장하는 아내와 식은 사랑과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서 외도가 시작됐을 뿐 섹스리스로 고통 받았다는 남편...유책 배우자가 누구인지 판결은 판사가 하더라도 이혼 소송장에서 다 담아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행간의 영역이 분명히 있다.
싸우지 않는 부부는 건강하지 않다. 제대로 싸우는 부부는 건강하게 싸우고 똑바로, 화끈하게 화해하며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 나간다.
덧붙여서 현명한 부부들이 파탄부부와 다른 점은 대화와 (부부싸움의 형태라 할 지라도) 섹스를 통해 위기를 해결한 다는 점이다. 즉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화해를 통해 체념과 권태가 관계를 잠식하는 걸 막는다.
미혼 남자에게 섹스가 남성성의 확인이자 애정의 지표, 배설창구 라면 기혼 남자에게 섹스는 단순한 배설 욕구 이상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채널이다. 더군다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배타적 성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기혼자에게 아내의 섹스 거부는 존재를 거부 당한 것만 같은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위험한 부부는 갈등과 싸움 없이 서로에게 지치고 실망하고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가는 부부들이다. 설사 두 부부에 ‘외도’라는 결정적인 파탄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년에 황혼이혼이나 졸혼 이라는 이름으로 끝난 결혼에 마침표를 찍을 확률은 대단히 높아진다. 어차피
그런 의미에서 ‘현모양처’를 자처하는 아내들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정말 좋은 아내였던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감정을 배제한 채 그 어느 때보다 민낯으로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배우자 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깟 “성관계”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남편의 월급을 당연하게 사용하면서 남편 몰래 친정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 적 없는지, 수익을 은닉하지 않았는지, 아내로써의 내 삶을 반추해야 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며 외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남자들도 더 이상 비겁한 변명을 하지 말고 시선을 안으로 향할 때다. 잠자리를 거부하고 ‘아이’만 돌보는 아내에게 사랑 받지 못해서 분노하고 절망했는가. 왜 무기력하게 소통의 부재를 바라만 보고 문제를 회피하다가 외부로 시선을 돌렸는지 생각해 볼 때다.
아내탓을 하며 외도를 정당화 하기에는 그대가 등진 아내와 자식이 받는 상처가 너무 깊고 예후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