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로 시작하는 요즘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그곳'의 낡은 세계관을 버린 지 오래다. 안타까운 현실은 떠남과 버림의 행위는 매 번 성급함, 배신, 위반이라는 비난을 달고 다닌다는 점이다. 해서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이전의 폐허를 등지고 새로운 집을 짓기까지 이어지는 공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은 폐부를 깊이 찌르는 비난보다 더 심각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해체시켜 당사자를 공허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무엇이라도 하면 좋겠다. 도망치든지 맞서 싸우든지. 불의하기도 싫고 불리해지기도 싫다면 조금 더 잘 들리는 목소리로 불평을 계속하면 어떨까. 사실 합리성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환영을 받지, 아름다운 내용을 담아내는 도구로 추앙받기에는 문제가 있다. 부분적인 합리화는 맹목적인 추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이리도 불편할까 생각하곤 한다. 긴 질문에 대한 짤막한 답들은 여기저기 널려있긴 하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하는 인간에게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말은 터질듯한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탄산음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시대를 앞서갔다느니 하는 '때'와 인물의 경주는 상상의 가치를 폄하하는 비유다.
간혹 나는 어떠한 질문에서 불편함의 이유를 찾는다. 나는 도대체 이 시공간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실존적 물음이 실은 보다 덜 불편하다. 물음 앞에 대답하지 못하는 상태는 더욱 덜 불편하다. 정말 불편한 것은 왜 나는 대부분의 이해에 반하는 존재로 태어나, '나'라는 의견을 숨겨야만 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오해의 소지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거나 적발당하면 배설의 욕구를 참지 못하는 이들의 목표 대상이 되는, 곧 '나'로서 자유롭지 못한 이 시공간에 갇힌 존재라는 현실이 나는 진실로 진실로 불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