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란히 앉아 식사하듯이
감정표현이 넘실대는 상황은 자기검열이 일상이 된 이에게 너무 갑작스럽다.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응답은 서툴러지고 느려진 반응 속도 때문에 더 어색하게 보인다. '자연스레' 위축된 그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지만, 그것이 왜 자신을 두렵게 하는지는 모른다.
왠지 사랑은, 사람을 동등하게 마주할 때보다 엇비슷한 조건이나 동등치 못한 관계에서 더욱 행하기 쉬워 보인다. 마음을 뺏길 정도로 아름다운 나만의 우상을 흠모하거나, 역으로 누군가를 정성을 다해 보살피듯 돕고 아낀다. 어쩌면 그것이 인지상정에 가까워서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불평등한 관계는 기울어진 식탁에서 식사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사랑마저도 적절히 계산해 보고 안전한 범위에서 추구하라, 는 의미를 담은 말이 아니다. 도리어 사랑하겠다면 가시 범위 너머에 있는, 사람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려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다.
장발장을 구원한 미리엘 주교의 식탁은 죄수로 낙인찍힌 걸인과 존경받는 성인을 하나의 시공간에 묶는다. 이 고집을 피울 줄 아는 이가 건너편에 앉은 사람을 본다. '동등한 존재'를 보는 눈은 누구도 깔보거나 우러러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식탁에 초대한 후 함께 식사하길 즐겨한다.
때와 조건에 따라, 상황과 배경에 따라 우리의 잘됨과 못됨은 쉬이 달라진다. 때문에 그대와 나의 가치는 마치 시소 위의 시선처럼 오르락 내리락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시소가 저울이 될 때 발생한다.
저울질은 매 번 더 나은 쪽을 골라낸다. 그리고 골라진 결과가 대등하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서로를 다치게 한다. 주는 이는 잘나지고 받는 이가 미안해지는 무한 반복에서 무슨 사랑을 찾을까. 차라리 뿌듯함과 고마움을 각자의 이익으로 챙기는 편이 솔직하고 이롭다.
어떤 면에서 차등을 발견하든 너는 나와 동등한 존재라는 믿음이 여기 있다. 이 사실 앞에서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이겠구나 생각해도 좋지 싶다.
'상대'를 수 백 개의 가치 체계를 넘어선 '나와 동등한 존재'라 여기는 사람만이 온전히 사랑할 힘을 얻는다. 깔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러러보는 이를 깔보지 않는다. 그러나 베풂에 대한 대가로 갈구하는 애정이나 베풂에 대한 대가로만 허락하는 관심은 '오랜 사랑'의 양분으로 적합하지 못하다.
사랑은 베풀게 하지만 베풂이 곧바로 사랑이 되지는 않는다. 사랑이 만들어내는 행동은 수 만 가지일 수 있지만, 수 만 가지의 행동을 다 모아도 사랑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몇 개의 무엇으로, 무엇 간의 조합으로 흉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등한 존재로서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식사보다 누가 더 가치 있는지, 그 명확한 결과를 가늠하는 저울질이 효율 면에서 편하다. 이것이 아마도 검열이 익숙한 우리에게 사랑이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