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책, 사람

문학될 권리, 기록할 의무 그리고 놓쳐버린 것들에 관하여

by 쓴쓴

집을 나설 때마다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책을 가져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가져간다면 무슨 책을 몇 권 가져갈 것인가, 하며 책상 앞을 맴돈다.

이 곤란한 습관은 마음의 거리감과 관련 있다. 가야 할 곳이 코 앞이어도 내키지 않으면 책을 들겠지만, 제 아무리 멀어도 마음에 기대를 채우면 책은 사치다. 그래도 사치는 부리라고 있는 법이라고 최소 한 권은 꼭 챙기고 본다.

좀 먼 곳을 간다면 아무래도 가벼워야 한다. 되도록이면 한 손에 착 감기고, 가벼운 재질로 만든 책이 좋다. 내용도 가벼우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너무 욕심이다.

가벼우나 결코 가볍지 않은

만약 카페라면 되도록 책을 많이 가져간다. 그것이 이득이다. 무슨 심상이 떠오를지 몰라서다. 좋아하는 곡을 우연히 듣게 될지, 옆 테이블의 대화가 마침 거슬릴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지, 앉은자리가 왠지 불편할지, 창 밖의 걸음들이 대단히 가벼울지, 유독 화창한 날씨가 쓸쓸할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사람의 마음엔 그런 거리감 같은 게 있는 듯하다. 마음이 측정한 길이가 짧을수록 눈에 가까워진 마음은 천리안을 보듯 선명하다. 미술 실력만 좋았더라면 당장에 그려줄 수 있다. 반대로 거리감이 길어지면 마음은 명치로 내려앉는다. 체한 듯이 막막한 이것은 안개 낀 날과 다름없다.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보려 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오늘의 두 눈을 사로잡을 무언가를 기다린다. 마음의 주인공이 되고 사유의 발화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마음이 멀어지면 소용이 없다. 눈이 아무리 책과 가까이 있어도, 가방 가득 책을 싸와도 창문에 겹치는 카페 안팎의 풍경이 더 재밌는 날이 있다. 그러다 문득, 이 마음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나는 펜을 든다.

기록은 재미에 의미를 더하겠다는 행위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막강한 권리를 가진다. 세상을 말 그대로 재배치하는 힘을 지닌다. 실제 하든 아니든, 순수한 상상이든 현실에 가까운 그 어디쯤이든 관계없다. 기록하는 자에겐 삼차원을 이차원의 세계로 분절하는 힘이 있다. 그가 자르는 단면을 따라 사람도 책도 풍경도 나뉘고 끊어진다.

왜곡이다, 반역이다, 외쳐본들 소용없다. 기록되는 세계는 자신의 말이 없다. 기록자를 위해 대신 소리 낼 뿐이다. 그러기에 이야기는, 글은 인간의 권리일 수밖에 없다.

다만 기록되지 않는 세계에 관하여 생각해본다. 내 마음의 거리감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풍경, 책, 사람을 기억내려 한다. 만약 문자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날이 온다 해도 기록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있으나 보이지 않는 까닭에 기록되서야 겨우 드러나는 이들이 있으므로. 그러기에 글은 다시 인간의 의무일 수밖에 없다.




혼자 먹을 밥 한 끼를 지을 때도 물 양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잡곡밥을 지으려는 자는 뿌옇게 올라온 쌀뜨물 아래로 한 치를 못 보았다. 내가 삶을 너무 쉽게 봤다. 그것이 부끄러웠다.

어떤 인물도 대상화되선 안 되고 누구도 가해자를 위해 소비되어선 안 된다는 명확한 사실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드문드문 앉은 버스는 나른한 느낌의 3D 영화관이 되었다. 창가로 얼핏 무엇이 지나가면 그런가 보다 넘겼고 거친 엔진 소리에 귀를 익혔다. 책을 손에 쥔 채로 하염없이 뒤로 흐르는 풍경을 보았다. 가로수가 펼쳐놓은 그림자놀이를 마냥 바라보다 오늘은 무엇을 한참 놓쳤을까 생각했다.

"우린 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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