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내 본 관찰기

지나치다, 지나쳐, 다 지나쳐라.

by 쓴쓴

일찍 집에서 굴러 나왔는데도 내 마음은 꿈쩍도 안 했다. 평소보다 가볍게 산책하러 나왔는데, 그것부터 문제였나 보다. 무슨 예지 그런 것인지, 가져온 책들이 오늘따라 별로 안 읽힌다. 더 가져왔으면 집으로 귀환하기까지 무거운 가방만 메고 다닐 뻔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질 못한 격이다. 날이 좋길래 힘차게 집 밖을 나섰는데 벌써 진이 빠져버렸다. 이런 날이 낯설진 않지만 매 번 원망스럽다. 평소처럼 인상 깊은 구절에 줄을 치고 몇 문장 옮겨 적었더니 벌써 하루 일과가 끝나버린 느낌이다. 인상이 팍 깊게 파인다.




친구가 하필 전화를 안 받는다. 평소엔 먼저 전화를 걸 녀석이었는데 뭐가 바쁜지 왜 안 받는지 이것도 원망이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타려면 3시간은 지나야 는데, 남은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 글을 쓴다. 그마저도 여기가 끝일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다행히 내가 오늘 고른 카페는 아파트로 둘러싸인 동네에 있다. 번화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주, 바삐 오간다. 나만 빼고 내부 풍경이 계속 바뀐다. 관찰할 분들이 많다.


손님 중 삼 할이 유모차를 끌고 온 여성이다. 아이를 힘들게 재우느라 지친 엄마들이 한숨을 돌리려 방문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깐이다. 밖에 나온 줄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보는 내가 다 원망스럽다. 시원한 커피를 즐기려다 아이를 달래려 유모차를 끌고 나간다.




한쪽 귀퉁이에서 사장과 알바 후보생이 대화를 나눈다. 재밌는 상황일 것 같아 집중해 본다. 면접 장면을 똑바로 볼 수 없으니 귀를 쫑긋 세워본다. 조심스레 이어폰 한쪽을 빼 보았는데 들리질 않는다. 그래, 이런 걸 몰래 엿들을 생각을 하다니 참 오늘이 못났다. 오늘을 원망하는 나도 못났고.


슬픈 곡이 흘러나온다. 전체 반복 설정을 해 놓았더니 재생목록 순서가 다 지나가서는 첫 노래가 돌아왔다. 뭐야 언제 돌아온 거지.


그나저나 친구는 내 카톡을 읽질 않는다. 밥 약속을 잡으려던 다른 친구도 바쁜지 답이 없다. 한 시간 전에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 마셨다. 아무래도 얼음물을 달라고 부탁해봐야겠다, 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 이 글을 쓴다.


평소엔 시상도 잘 나타나고, 쓰고 싶은 생각의 파편들도 잘 떠오르더니 요즘은 펜만 굴리는 게 일이다. 굴러가야 할 머리는 가만히 있다.


돌을 굴려 박힌 돌을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돌을 굴리는 게 아니라 그냥 빼면 되는 건가. 무슨 말을 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해가 하늘을 돌아와서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그래도 창밖은 보고 싶어서 밖이 보이게 살짝 열어두었다. 그 사이 알바 후보생은 면접을 끝냈고 친구에게서 답장을 받았다. 시간은 그래도 간다. 막 지나간다. 아직 책을 세 장 밖에 못 넘겼다. 오늘은 마저 다 읽어야는데, 어쩌지.


지나치다. 오늘처럼 이렇게 기운이 없는 날은 드문데. 지나치다, 너무 지나쳐.


다 지나쳐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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