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권을 잃으면서 시작되는
누구나 무언가에 중독이 된다. 답을 내기 어려운 고민과 해결점을 찾지 못한 과제를 잊으려고 나름 고안해 낸 회피형 전략이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기도 한데, 서른여섯 번째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실은 서른여섯 개 방법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신이 도망치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고민을 해결할 수 없을 때 당신은 무얼 하는가.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을 산다. 독서에 중독이 된 건지, 책이라는 물건을 획득하는 데 중독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둘 다여도 좋을 듯하다. 아무튼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날은 어김없이 하루의 낙이 없는 날이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의지가 일(하나)도 없다. 그래서 결국 몇 번을 고르다가 동네 서점까지 걸어가서 사 오고 만다. 그러면 성공이지, 뭐. 할 일이 하나 생겼고, 끝내 해내고 말았으니까.
책에 중독이 되면 무엇이 그리 좋길래 그러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우선 좋은 정보를 얻는다. 그럼 조금 똑똑해진 느낌이 든다. 삶을 전략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전사는 아니어도, 너털웃음으로 문제를 받아들이는 지혜자 정도는 된 것 같다. 소설을 읽을 때면 무능하지만 나름의 신이 된 것 같다. 남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마음껏 휘젓다 보면 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하면서도 본인은 정작 그 소용돌이에서 구원받은 기분이다.
수필은 마음껏 남을 엿보라고 허락받은 느낌이다. 방 구석구석이 다 비치는 전신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다 보이는 듯하다. 근데 가끔은 동물원 우리 안의 무언가를 비추는 듯한 글이 있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시는 느슨한 단어의 연결을 보며 합법적으로 멍을 때리게 된다. 그것이 시를 읽는 방법이다. 무의식을 빌려 흩어지는 세계를 바라보기. 그렇게 흐려진 시계(視界) 덕분에 잠시 상념을 잊는다.
여러 종류의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섬뜩한 생각이 들을 때가 있다. 특히 소설이나 수필을 읽을 때 더욱 그렇다. 우린 모두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구호가 다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가정' 말이다. 과연 우린 인생을 얼마나 소유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일까? 아니라면, 얼마나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면 애초에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테지. 지분, 그러니까 주식이라는 형태로 인생을 소유하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임대라는 개념으로 잠시 빌린 상태라든지.
추적을 해보자. 나를 주로, 말 그대로 주인이 되어,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돌아가지 말고 조금 쉽게 생각해보자. 방금 전 말한 중독에서 시작하자. 나를 예로 들면, 혹시 나는 책에게 인생을 빌린 사람이지 않을까. 마음이 어려우면 책을 펼치고, 책을 빌리고, 책을 산다. 가득 쌓인 책을 보면 뿌듯하고 읽은 책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렇다면 책이라는 무생물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페티시즘, 그러니까 나는 물신 숭배를 하는 중인가.
잘 되새겨보면 사람은 물건 없이 살진 못한다. 호모 파베르, 즉 물건을 만드는 인간이자 그것으로 자신을 만드는 인간. 우리가 만든 문화가 우리를 다시 만드는 현상은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다. 조금 유치한 비유지만 내가 열심히 딸기잼을 만들고 난 후 먹으면 딸기잼이 내가 된다. 사람은 나를 만들려고 물건을 만들고 그것으로 나를 만든다. 조금 늘여서 얘기하면, 우리는 내가 되기 이전의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 되게 한다. 거 참 말 어렵게 한다.
그런데 내 주변에 내가 만든 물건이 있나? 모니터 주변의 물건을 둘러본다. 전등, 지구본, 시계, 달력, 물통, 필통, 서류 뭉치, 책장, 책, 휴대폰, 충전기, 약봉투, 마스크, 걱정 인형, 블라인드, 책상, 보조 배터리, 충전기, 침대, 이불, 베개, 쿠션, 여러 옷가지들, 가방, 멀티탭,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앉은 의자. 이 중에 내가 만든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이게 뭘까. 그러니까 나는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물건으로 나를 만들고 있다, 는 말이 되는 걸까?
나를 이루는 것들이 타인에게서 왔다면 우리는 서로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게 맞는 말인지, 잘 생각해보라. 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의 글을 읽고 어떠한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특별하진 않아도 반복하던 일상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고도 가정해 보자. 그러면 당신의 결정은 나의 것일까? 그러니까 이 글을 쓴 나의 것일까, 아니면 '나'라는 당신의 것일까?
중독은 그래서 시작되는가 보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서 먹은 아담과 이브를 기억하는가? 아름다워 보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고 자신을 돋보이게 할 무언가가 내 앞에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취할 용기와 의지와 힘이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망설이는가. 손을 뻗어 얻으면 그만이다. 깨물어 삼켜서 나로 만들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거기서 시작이다. 내가 만들지 않은, 정성까진 아니어도 마음과 시간을 들여 만들지 않은 무언가가 내게 들어왔다. '나'라는 우리는 거기서부터 '나'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다.
통제권을 아예 되찾아올 순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상품의 세계니까 말이다. 화폐를 매개체로 하여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파는 세상에서 모든 것에 자급자족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것에 나를 계속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생각엔, 중독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다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나쁜 습관은 없앨 수 없지만, 다른 습관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니 중독된 무엇을 좋은 중독으로 바꾸자. 아니 뭐라고?
그렇다. 중독은 돌고 돈다. 그래서 사람은 취미라는 중독에 빠진다. 때론 물건이 아닌 사람에게 빠지기도 하고 특정한 행위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 일이 심해지면 신경증이 되고 병이 되겠지만, 우린 대부분 그런 몸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마음이 어떤 것에 중독되는지도 모른 채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아니, 숙주는 우리고 중독이 우리 몸과 마음, 삶을 잠식한다고 보면 중독이 머물렀다 떠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계속 중독이라는 통칭하는 다른 이름의 감옥들을 탐방하듯 갇혀 지내자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의지를 가져라, 라는 뻔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통제권을 반납하자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다음 단락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각자의 삶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계획과 다른 사건들이 끊임없이 터진다. 갑작스레 마음이 동해서 나답지 않게 적선을 하기도 하고, 하늘 색깔이 이뻐서 한참을 쳐다보다 버스를 놓쳐 걷기도 한다. 우연히 놓고 온 우산 덕분에 갑작스러운 비 소식이 오히려 즐겁고, 등록금을 늦게 내는 바람에 입학 취소를 당하기도 한다.
그날 내가 그곳에 없었더라면, 내가 그날 그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만약 네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모든 가정들이 우리 삶에는 넘쳐난다. 하지만 이미 실재했고 일어났으며, 그 과거가 지금의 현재를 만들었다. 내가 계획하지 않은 나의 삶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인생의 중요한 사건은 거의 영에 수렴한다.
때문에 변수는 오늘을 만들고 이어붙이는 은총이 되버린다. 그 때문인지 나는 병을 앓고서부터 이처럼 말한다. 너무 기분이 안 좋은 날, 자꾸만 손에 잡은 게 바닥에 떨어져서 허리를 자주 굽혀야만 할 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전혀 실행 할 의지가 안 날 때, 이렇게 말한다. '아, 참 행복하다.' 또는 삶에 변수가 너무 넘쳐서 불안할 때, 모든 우울한 기분이 마음에서 터져 나와 내 주위를 감쌀 때, 이렇게 속으로 외친다. '제길, 오늘은 은총의 날이구나.'
그럼 언젠가 그 말이 진실이 된다. 나는 무슨 영적인, 종교적인, 신비주의적인 용어를 쓰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넘어서서 중독을 해치고 나와, '나'라는 주도권을 두고 싸우려는 것들과 더 이상 다투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럼 정말 어느 때엔 행복해진다. 그리고 은총이 찾아온다. 몇 개의 중독을 이겨내게 한, 통제를 벗어난 하나의 변수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