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울증을 모른다
꿈을 꾼다. 나를 폄하했던 기억 저편의 인물들이 섞여 나온다. 그들과 힘껏 싸운다. 잠도 편히 잘 수 없다. 나에겐 그것이 우울증이다. 밤을 새우는 목적도 낮의 시간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다 사람 때문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엔 과정이 숨겨져 있다. 인과율이라는 법칙이 무서운 이유는 조건이 주어지면 반드시 답을 내놓는 데 있지 않다. 그 사이에 놓인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마찰력, 즉 외부 힘에 대항하는 내력이 우리 내부에 있다. 우리가 땅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중력과 같은 은밀한 속삭임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때를 맞춰 열린다. 외부로 향하는 호기심을 차단하는 끔찍한 내부의 적이다. 사려 깊은 척하는 내면의 의견이다. 괜찮아. 그쯤 해도 돼.
인간은 인과율이라는 법칙을 이성으로 깨우치면서 두려움을 정복하고 상상하던 모든 이상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부산물이 거기 있었다. 이 부작용의 동일어는 '과정'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절차가 원인을 결과로 만든다. 결과를 만드는 힘을 발견하였지만 어떤 방법이 이로운지, 어떻게 그것을 이끌어내는지, 이에 관한 물음들이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간은 미처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다.
자연과학이 대단한 까닭은 결과를 역추적하여 숨겨졌던 원인을 가능한 만큼 밝히는 데 있다. 오히려 일어날 수 있는 결괏값을 미리 추론하는 데 의미를 두는 일은 아무래도 비교적 덜하다. 왜냐하면 이는 앎을 추종하는 즐거움이거나 위험을 방지하려는 조심스러운 걱정에 그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현재이지 않은가. 이미 일어난 일이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든 현재라는 시간에서만 조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보자.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과거라는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현재를 바꿔야 한다.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가? 우울증은 철저히 현재의,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나의 우울증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렇게'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다. 손가락을 튕기듯 아주 사소한 생각 하나가 우울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시작했을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몸이 아프고 의지를 잃고 잠이 늘고 사는 게 귀찮아진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증상을 앓고 나니 우울증이란다. 결국 사람은 결과를 보고 나서야 원인을 살펴볼 뿐이다.
병원을 다니면서 극복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극복이 뭔지도, 극복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밖에 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졸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지겹도록 온 몸을 붙잡는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는 100m 정도였다. 2층에 있던 동네 카페 창가에 앉아 억지로 햇빛을 향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였다. 그것이 '다'였다.
심지어 단 둘이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사람을 앞에 두고 졸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고통이 따른다. 끔찍한 마찰력. 거스를 수 없는 중력.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처음 배울 때처럼 사는 방법을 다시 익혀야만 했다. 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낮의 시간과 야외라는 장소에 익숙해져야 했다.
카페를 시작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시선들이 많은 확 트인 장소보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 덜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를 인식하던 내가 외부에서 재차 나를 규정할 수 있으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꿈에서 나를 폄하했던 기억 저편의 인물들이 섞여 나온다. 그들과 힘껏 싸우느라 잠도 편히 잘 수 없다. 그것이 우울증이다. 밤의 시간을 세어 보는 이유도 낮의 시간을 꺼려하는 까닭도 사람이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대해서 잘 모른다. 던져도 깨지지 않을 만큼 매우 안정한 정육면체와 같다는 사실을. 우울증을 앓는 이는 그 안에 갇혀서 누군가가 강한 힘을 행사하려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주 잘 포장된 택배 상자와 같다. 하지만 주인을 찾지 못한 상자처럼 그냥 가만히 버려져 있다. 날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사실 더 가깝지만 끔찍한 외로움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울증을 확진받으면 반복되는 일상을 만들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 계획 안에 반드시 운동을 추가하라는 말도 듣는다. 때문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극복하기 더 어렵다. 스트레스를 가만히 앉아서 풀어왔던 사람은 이제 그 습관 때문에 우울증에서 더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아도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 앓아도 다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이제 삶을 바꾸라는 조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병을 치료하려는데 '나'를 바꾸라는 말에 당혹스러워한다. 때문에 난 너무 괴로웠다. 책상에 가득 쌓인 책을 보면서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이해하길 바라지만 당신은 모른다. 나 자신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그게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을.
이제 1km는 걸을 수 있다. 밖에 나와 걷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목적 없이 걷진 않는다. 반경 내에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나를 만족시킬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곳에서 목표를 이뤄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오늘처럼 우울할 때는 목표를 이루어도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유를 찾아도 알 수가 없다. 그냥 편히 쉬고 싶은 날이 있다. 심해진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리고 조용히 그냥 아무도 모르게 휴식을 취하고 싶은 시간이 불쑥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