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성직이라 여겼던 어떤 직업군들의 사람들도 실은 일반인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도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말할 줄 알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단체 행동을 할 줄 안다.
사회와 선출된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것이 현대 세속사회, 민주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직업윤리 따위를 무시하거나 요구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연한 것이 당연히 거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게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더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희망이 조금 생긴달까.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람을 사람답게 할 보편적 가치를 찾던 사유를 자연스레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여겼던 가치들이 지속적으로 뒤집어지는 역사를 본다. 가치가 엎어지는 이유는 명쾌하리만큼 단순하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세계야,라고 그어놓은 선을 누군가가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발견된 가치의 경계 밖에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귀납적 발견이 재차 진행되고 지식의 영역이 넓혀지면서도, 이전의 비존재들은 선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구분선과는 관계없는 숨을 쉬었고 마지막으로 내쉴 자리를 내주며 떠났다. 인식의 지도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을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행동이었다.
일 년도 더 된 어느 때에 인공지능과 상담에 관한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듣고 난 소감은 간단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시점에 인공지능은 많은 것을 대체할 것인데, 그것은 사람을 위협하는 방법이 아니라 안심시키는 방식일 것이라고.
사람은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한, 사람을 닮은 기계에게 마음을 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대체가 아니라 수용이겠지. 그러므로 나는 자신들의 고급 지식을 시혜하려는 전문가 집단보다 인류가 다 함께 쌓아 올린 빅데이터가 담긴 과학기술의 집약체가 더 믿을 만하다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고유한 창조성에 관하여, 가치 판단과 과학의 관계에 관하여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관한 윤리를 어기는 응용과학 전문가들의 결정을 보며 전문가 집단이 내리는 가치 판단이 과연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고민한다.
덧붙이자면, 특정 분야의 윤리는 관련된 전문가만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철학적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모두가 어느 정도 참여하여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법이랄지.
대학 입학을 두 해 앞둔 때쯤이었나,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의 어떤 분은 '우리 아들, 공부 잘한다'라는 아버지의 입바른 자랑을 듣고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대다가 초등학생 시절, 장래희망을 빈칸으로 제출한 일로 조금 유명해졌던 일화가 떠올랐다. 그 일을 말하려다 싫어하겠다 싶어 그만두었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분의 논지는 이러했다. 이왕 할 거면 의사를 해라. 판검사보다는 의사가 나은데, 법조계의 사람들은 결국 과거의 일을 기록해 둔 종이를 읽고서 그 일을 현재에 반복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의사는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로서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새로운 일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니, 좀 더 유망한 직업이다.
과거를 반복하기보다 미래를 선도하라는 구호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럼에도 반감이 들었던 까닭은 두 가지 외에는 다른 직업을 언급하지 않는 먼 친척의 빈약한 예시 들기 때문이었다. 본디 젊을수록 권위적인 충고에 반항심이 생기기 마련이라 그런 것인가 싶었지만, 역시 집안엔 검사나 의사가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화답에, 내가이상하다 여기며 떠올렸던 질문은 다른 영역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