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울음소리, 산 자들을 위한 애도
영화 '곡성'은 미끼를 문 자들의 이야기다. 살아있다면 누구나 미끼를 물 수 있다는 비극이다.
수수께끼 같은 무명의 말
왜 도대체 뭣 때문에. 주인공 종구의 절규다. 그가 딸을 찾아 길을 내달리다 무명과 조우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내 딸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라는 질문에 유일하게 미끼를 물지 않은 채로 전지적 시점인 무명의 답이다. "네 딸의 아비가 의심해서 그래. 의심해서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죽여버렸지."
'아빠'의 돌아오는 대답, "그건 우리 딸이 먼저 해코지를 당해서 그렇지". 다시 원점이다. 돌고 도는 인과 중 무엇이 시작인가. 무명은 딸이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녀는 지금 종구의 딸을 책임의 굴레에서 구출해내었다.
비극의 고리
종구는 딸의 절규를 기억했을 것이다. "뭣이 중헌 지도 모르면서". 아비인 그는 딸의 어미를 방에서 몰아내듯 내보내며 딸에게 물었다. "너, 그 일본인 만났어, 안 만났어?" 이러한 태도에서 딸을 보호가 필요한 피해자로 대하지 못하는, 즉 아빠보다 경찰의 모습만 드러내는 종구를 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종구의 질문을 시작으로 딸이 소리를 지르며 미쳐간다. 독버섯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원인을 알 수 없는 비극의 고리는 어느새 종구의 미숙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고, 고발 그리고 드러난 광기
그래서인지 무명의 말은 경고로 들리기도 한다. '악은 악으로 갚을 수 없다. 네 살인은 악의 연속일 뿐 비극을 끊을 수 없다'. 영화 후반부 비극은 딸에게 손을 뻗친 마을의 광기를 멈추려는 종구의 살인 모의 장면으로 연속된다.
독버섯이 없어도 종구가 살인의 광기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종구의 친구 중, 뛰노는 그의 분노를 잠재울 사람은 없다. 도리어 동조한다. 마치 이미 벌어져야 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는 듯이. 그들의 현장을 본 무명은 딸을 찾아 마을을 달리던 종구를 고발하는 중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살인자야.
네 딸의 아비
네 딸의 아비. 무명은 무슨 의도로 자신과 대면하는 종구를 굳이 어렵게 지칭할까. '네'는 정확히 종구를 지칭한다. '네 딸'은 질문한 자(종구)의 딸을 말하는 것. 터무니없지만 가능한 생각이 두 가지 정도 떠오른다. 질문한 자(종구)의 딸은 아비의 딸과 다르다. 혹은 딸의 아비는 네가 아니다.
전자는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딸은 지금 네 딸이 아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딸이 아니다. 네 생각을 벗어난 상태다. 그러니 네가 말하는 딸은 지금 너의 딸이 아니다. 후자의 해석은 이러하다. 딸에게 너는 지금 '아비'라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딸은 이 순간 너를 아비라 말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살리려는 자
무명은 종구에게 '넌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 네 딸을 살리려는 여자".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은 종구도 안다. 그러니 여자가 드러내고 싶었던 자신의 정체는 '살리려는'이다. 실제로 영화 상에서 그녀만이 딸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무명은, 비극을 방조한 신부나 살인에 동조한 친구들과 달리 살릴 의지와 방법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종구는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는 앓아누운 딸에게 약을 먹이는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던 아빠였다. 버섯 독에 미쳐버린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던 경찰이었다. 그가 해왔던 일은 공포와 분노, 혐오로 소리 지른 것뿐이다. 상황을 무관심과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는 자신에게 여전히 딸을 살릴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온 가족이 살해된 장면을 보고서야 무명이 진정 그들을 살리려 했음을 관객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종구의 의심에도 딸은 죽지 않았다. 무명은 정말 누구를 살리려 했던 걸까. 집에 벌어진 처참한 광경을 보고 종구가 내뱉던 마지막 말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걱정 마, 아빠 경찰이야. 아빠가 알아서 할게". 그러나 그는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울음소리
제목이 무색하게도 잘 기억나는 곡소리가 없다. 왜 그런가. 비극을 맞이한 당사자 외에는 울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린 첫 살인 현장과 집으로 돌아가는 종구를 놓친 무명이 소리 지르는 장면 외에는 '곡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비극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무명 외에 없다. 수군대는 주민들은 자신들이 옮긴 소문이 비극의 원인을 독버섯에서 외지인으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광인들과 비극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은 방관자가 되어 마을을 덮은 슬픔과 자신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도리어 벌어진 사건을 기이한 일로 바꾸어 버린다. 비극의 시작과 마지막 비극 사이에 어떠한 애도도 없다. 오로지 분노와 의심만 관찰된다.
사진을 찍다
일본인과 일광(무당)은 사람들의 살아있을 때와 마지막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살아있는 사람을 담는 행위가 표적을 정하는 행동이라면 죽은 사람을 담는 행위는 무슨 행동일까? 촬영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사진은 죽음이라는 결론을 남긴다. 그들은 마치 확인사살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사진을 찍는 두 인물만이 죽은 이들이 겪은 죽음의 과정을 안다. 마을 사람들은 피해자들에 관한 무성한 소문을 서로에게 전할뿐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그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정작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죽음을 데려오는 두 인물만이 확인하기 위한 관심을 가질 뿐이다.
예수의 말을 인용하다
마지막에 등장한 뿔 달린 악마는 그를 죽이러 찾아간 부제 앞에서 예수의 말을 인용한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성직을 행하는 자 앞에서 악마로 변하며 성경을 인용한다.
영화 시작과 끝에 인용된 예수의 부활은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로마제국과 권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의 부활은 제국의 폭력을 극복하다 못 해 이긴 것을 의미한다. 그는 죽음으로 사라질 수 없다는 듯이 '보이는' 육체로 살아난다.
이전에 종구와 함께 외지인의 집을 뒤지다 그의 어두운 면을 본 부제는 그를 악마로 지정한 자신의 결정을 확인한다. 이것은 곧 죽음, 즉 생명을 종말 시키고 인격을 단절시키는 힘이 '눈에 보이는' 육체로 살아있음을 부제가 보았음을 시사한다.
기생하는 악
인격이 악을 입었다. 죽음을 만드는 악을 외지인과 일광이라는 인격이 뿜어낸다. 그리고 실수를 반복하는 모든 등장인물에게서 악이 나온다. 뿜어져 나온 이것들이 육체를 지닌 인격을 만나면 죽음이 된다. 악이라 할만한 것들이 이제 다른 인격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암시하듯 악은 죽음으로 잠시 연명할 뿐 자생하지 못한다.
때문에 생명이 먼저고 죽음은 다음이다. 악마가 외지인의 몸을 빌려 부제 앞에 나타났다한들 그 또한 육체를 지닌 생명에 종속된 자로서 무명에게 쫓겼었다. 악에게 생명은 도리어 죽음인 셈이다. 생명을 죽이는 악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것을 죽음으로 갚으려 하면 무명이 경고한 대로 악이 이어진다.
영화 속 인물들이 마주한 악은 이처럼 생각보다 컸다. 규모나 수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다른 예상치 못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단순히 무섭거나 혐오스러워 짓눌러 죽이는 벌레처럼 쉬운 대상이 아니기에 그렇다. 단순한 호기심, 무책임한 이해심, 느긋한 여유로는 해결될 수 없는 악이 등장한다.
다시 무명으로
극단적인 선택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악의 실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이 영화가 해결책의 어떤 실마리를 남겨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되려 질문만 던져 벌집을 쑤셔놓듯이 난장판을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무명은 어떠한가? 마치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는듯한 그녀에겐 답이 있을까?
무명은 영화가 끝난 뒤 누명을 벗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녀가 영화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는 믿을만한 존재가 된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고 곡소리가 곡소리로 멈추었을 때 다시 나타난 일광과 일본인의 정체가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 자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기까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한 편의 혼돈. 의심과 이유 없는 비극의 연속. 끊어낼 수 없는 현실. 결국 끝을 내야만 아는 비극. 아마도 이 어지러움을 영화가 말하려던 요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필자의 눈에는 사람을 끝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깨닫는 존재로 설정한 영화가 보였다. 종구가 벼락을 맞았던 덕기의 비어있는 냉장고를 보고 외지인에게 의심을 품었듯이, 또한 무명의 말에서 종구가 진실을 보았어야 했듯이 끝에 도달하지 못한 중간지점에선 아무런 근거도 어떠한 확신도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전반부에 이미 독버섯이 광기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으나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추측들은 여전히 소문으로 무성하다. 부제의 사촌 형인 종구의 동료 경찰이 갑자기 독버섯의 광기에 노출된 마지막 장면의 갑작스런 등장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는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그 자체를 담아낸다.
과장된 불편
영화 속 인물들은 당황, 의심, 두려움, 분노라는 감정과 함께 모든 상황을 하나의 결론으로 서둘러 모은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주민들은 여전히 실체를 보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고요한 일상에 불현듯 찾아온 혼돈과 맞닥뜨린 인생들은 그들에게 드리운 의심의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근거 없는 의심으로 비극의 원인을 독버섯이 아니라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외지인에게 돌린다.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지는 급작스런 잔혹한 결정들은 꺼림칙하고 불편한 것들을 서둘러 없애려는 억지스러운 시도가 아니라 보기 어렵다.
영화 이후의...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관람 이전의 관점을 유지하기 어렵다. 벌어진 악과 악의 피해자, 악을 막으려는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들을 만들어 낸 상황을 쉽게 갈무리할 수가 없다. 인과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상황을 분별하기 어려워서다.
그러기에 채 사그라들지 않는 잔상들 사이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결론 지으려 할 때마다 자신이 무기력하게 서투른 결정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의심을 놓지 않는 좋은 관객인 된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관객은 영화관 바깥 세계로 영화의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옴을 느낀다. 혐오와 악이 함께 뭉쳐져 피해자의 아픔은 등한시되고 자신과 관련되지 않는 일이라면 누구도 울어주지 않으며, 결과를 보기 전까지 손을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누가 자신을 해칠지 모르기에 서로를 쉽게 믿을 수 없는 세상을 본다.
사족 - 신부의 말
종구가 딸 문제를 해결하려 성당에 방문했을 때다. 신부는 그에게 일본인에 관한 '다른 좋은' 소문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말하길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그를 범인으로 몰지 말라고 한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말라고. 그러고는 교회가 해 줄 일은 없다고 말한다.
믿음을 구하는 종교인이 비극 앞에선 왜 확실한 것을 요구했던 걸까? 그의 눈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딸을 둔 아버지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었을까. 그에게서 종교인이 풍길 만한 어떤 분위기도 찾을 수 없다.
믿음을 구하는 동시에 현실을 보듬어야 하는 역설적인 영역이 종교라고 한다면 그에게선 둘 중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이질적인 두 성질을 고루 섞어 베풀어야 할 어떠한 따뜻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