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이어질 하루
첫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84
두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87
세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92
네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95
다섯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100
필자는 마녀 보감에 등장한 인물들을 보며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보았다. 홀로 살 수 없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을 발견하며 슬퍼하고 기뻐했다. 한 사람의 선택이 타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한 사람의 희생이 다른 이의 삶을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놀라워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랑에 목마른 이의 선택: 홍주
사람의 마음을 간절히 갈구했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홍주는 사랑하는 마음들을 죽여왔다. 사랑을 알 수 없었던 홍주에게 사람들의 사랑과 소원은 자신의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연희에게 모질게 대한다. '진실한 사랑의 희생만이 마지막 초를 켤 수 있다'는 '마의금서'의 마지막 장을 알게 된 허준이 연희를 위해 곧 죽을 거라는 비밀을 그녀에게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주도 변한 것일까? 허준과 보낼 미래의 계획은 단꿈일 뿐이라며 연희를 질타하는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사실을 알게 된 연희는 허준에게 울며 떠나라고 한다.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 허준이 죽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을 위해 도망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허준은 떠나지 않고 '희생수'를 마실 각오를 다질 뿐이다. 하지만 병을 바꾼 연희는 대신 그 약을 마셨고 '진실한 사랑의 희생'으로 저주를 풀고 사라진다. 그러나 홍주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연희에게 해주었던 말 때문에 죽지 않은 허준이 자신의 남은 삶을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 몰두할 것이라는 사실을.
희생하는 이의 선택: 최현서
죽어가던 홍주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바라보는 최현서의 '그 눈빛'이 싫었다고 울부짖는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최현서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사람들에게 수 없이 버려졌던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복수를 해오던 그녀는, 연모하던 최현서 대감이 번번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복수에 방해되는 이들을 제거하고, 살아남기 위해 연희를 사랑하고, 연희가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며 살아왔지만 공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최현서 대감은 그녀의 공허한 마음을 진작 알아챘었다. 그러기에 온 몸으로 저주를 뿜어내는 제자를 혼신의 힘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그녀가 훗날 품어야 할 고통의 대가가 그녀만의 아픔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상처 주었던 모든 이들의 아픔마저 그녀가 짊어져야 함을 알았기에 최현서는 스승으로서도 그녀의 폭주를 막아내야 했다.
최현서는 자신의 선택이 나라를 위한 것만이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아들 풍연의 몸에 새겨진 흑주술을 자신의 몸에 담은 최현서는 죽어가는 홍주를 안고 풍연이 피운 '삼매진화'의 불꽃에 자신을 던진다. 자신을 원망한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밖에 남길 수 없었던 그의 삶은 마녀보감의 배경에 굵은 뼈대가 되어준다.
모든 이를 품어내다
홍주는 죽어가며 자신의 죽음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거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하늘의 뜻을 명분으로 왕좌를 차지한 사람들과 무엇이 옳은지 모르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한, 몇 백 년이 흘러도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저주 속에서 살 것이라며 세상을 저주한다.
그녀를 바라보던 최현서는 홍주에게 우리 모두가 저주받은 인생이라 답한다. 쓸쓸한 그의 감정이 묻어나는 대답에 필자는 이 말에서 벗어난 인생이 없음을 조심스레 생각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저주 아래 있다. 우리는 그 저주 앞에서 살아간 두 인물 중 누구에게 더 공감의 표를 던질 수 있을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지만 필자는 다만 끝까지 홍주를 포용하는 최현서의 마음에 경탄할 뿐이었다.
포기한 이의 선택: 풍연 그리고 대비심씨
풍연은 허준이 건넨 약수를 마신 후 연희를 대했던 자신의 태도와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그리고 환영으로 나타난 아버지, 최현서 대감과 대화를 나누다가 연희에 대한 과한 책임감이 집착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한 집착 때문에 연희를 지키지도 못했고 더욱 힘들게 했음을 알자 연희를 보내준다. 그는 이제 연희의 행복만을 바란다. 그리고 연희도 자신을 위해 사는 오라버니가 아니기를 빈다.
대비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저주를 품고 태어난 연희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게다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만회해보려다가 연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도리어 해치기만 한 자신을 발견한다. 연희가 떠나는 날 인사할 용기도 없는 그녀에게 연희가 찾아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며 살겠다고 전한다. 그 말에 대비심씨는 저주를 꼭 풀어 네가 살고 싶은 삶을 살라고 말한다.
연희를 옭아매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게 된 두 사람이다. 손아귀에 쥐지 않고 놓아주겠다는 결정 덕분에 연희를 묶은 운명의 올가미가 한결 가벼워진다. 여전히 운명의 매듭은 튼튼히 묶여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연희는 자신의 저주를 풀면서 동시에 주변이들의 마음에 맺힌 저주도 풀어준 셈이 되었다.
용기를 낸 이의 선택: 순득
순득은 솔개만큼이나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친척도 없다.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노잣돈을 훔치거나 대신 궂은일을 해주며 벌어먹고 살던 도둑이었다. '남 등쳐먹는 일은 있어도 짐 되는 일은 안 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타인에게 짐을 주기 싫어하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요광 도사에게 준다. 용기내기 전까지 자신이 요광에서 짐만 될까 봐 걱정했던 순득이었다. 그러나 요광의 말대로 순득은 그에게 짐이 아니었고, 그의 집이 그녀의 집이 되었다.
사랑하는 이의 선택: 허준과 연희
허준은 어머니를 잃고 난 후 사랑하는 이를 또 지키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왔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던 허준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았다며 '진실한 사랑의 희생'인 죽음을 택한다. 기꺼이 연희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희생수'를 마신다.
연희는 저주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초를 하나씩 키며 저주를 풀어갈수록 사랑하는 이가 죽을까 봐 걱정했다. 그녀는 허준이 자신을 위해 죽을 거라는 말을 듣자, 허준이 자신과 함께 있는 동안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다고 고백한다. 더는 사랑하는 이를 잃을 수 없는 연희는 허준을 속이고 자신이 희생수를 마셔 마지막 108번째의 초를 마침내 켜 저주를 풀었다.
허준과 연희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소원을 들어주며 107명의 사람을 살려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희생하고자 했던 용기로 주변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연희의 뜻밖의 희생이 의원 허준이 태어난다. 연희의 죽음 앞에 슬퍼하던 허준은 연희의 바람대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의원이 되고자 한다.
사람의 마음
연희를 조선의 마녀로 만든 저주가 풀리자 조선도 저주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저주의 희생자도 사라졌다. 마치 없는 일인 것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다시 흘러간다. 하지만 연희를 기억하는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한다. 의서를 쓰며 허준은 연희와의 기억을 되짚으며 조심스레 마음에 기억을 재차 새겼을 것이다. 좋은 의원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펴야 한다는 귀한 이와의 경험까지도.
사람의 마음은 결국 용서와 용납으로 풀린다. 한 사람(홍주)의 고통이 잊히지 않고 왕 삼 대(인종, 명종, 선조)를 걸쳐 저주가 지속되었다. 너무 쉽게 저질러진 악행이 한 영혼을 파멸로 이끌었고 그것이 나라의 존망까지 결정지었다. 하지만 연희와 허준은 그리고 최현서 대감과 풍연, 요광 도사는 저주를 저주로 갚지 않았다. 거짓되지 않은 진실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는 용기로, 타인을 품는 용납과 희생으로 저주가 풀어졌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한 사람의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영웅 설화로 보지 않는다. 한 사람의 억울한 경험이 한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한 공동체를 살릴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이 짧은 픽션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겪으며 연희와 함께 모든 인물은 마음의 병을 치유받는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은 마녀보감이다
연희의 죽음은 슬프다. 결국 살려내지 못할 그녀를 위해 허준과 여타 인물들과 함께 달려온 시청자들은 허탈하기까지 하다. 불가항력적이고 차라리 연극이기를 바라는 현실을 드라마에서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허준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의연하게 과거를 보고 의원이 되어 후학을 양성하며 보감을 저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시청자들은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느낀다. 연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소중히 품은 채 연희가 자신에게서 잊히지 않게 하려는 그의 소원이 담긴 행동이다.
보감, 과거의 귀감이 될 만한 사실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연희와 함께한 날들이 자신에게 귀중했듯이, 그는 다른 이의 삶도 소중하다 여겼을 것이다. 연희와 조선을 파멸로 이끌어가던 한 백성(홍주)의 사례를 보며, 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던져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 했던 간절함이, 요광 도사에게 희생수를 전달했던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의 말처럼, 그 의서로 완성되어 수 천명의 목숨을 살리게 했다.
진실함으로 지켜낸 평범함
40년이 흘렀다고 나온다. 조금 당황스러운 빠른 전개지만 마녀보감이니 허준의 생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허준은 제자 앞에서 조선의 의술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그가 지켜낸 세상은 더 많은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난 조선이었다. 그가 연희와 함께 간절히 바라던 평범한 일상을 사람들에게 선물해주었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살짝 엿본 듯한 제자가 허준에게 묻는다. '스승님, 책에 왜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이나 사랑에 빠지는 약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까?' 그러자 허준은 대답한다. 의술은 침술과 탕약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 마음이 그가 노년이 될 때까지 지켜낸 청년 시절의 진실함이었다.
연으로 이어진 인연
의서 저술을 마친 허준은 제자와 함께 한양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산기슭에서 '그 연'을 다시 본다. 처음 연희를 만났던 그곳에서 보았던 연과 같은 것. 그러나 다르다. 세상을 향한 동경의 연이었던 연희의 연은 이제 허준을 향한 마음의 연이다.
연을 따라 들어간 초가집 마당에 펼쳐진 오색찬란한 빛깔로 물든 종이를 보며 허준은 웃는다. 그녀와 함께 해왔던 시간이 떠올라서다. 40년의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연희가 있었던 집의 입구에 들어설 때 갓이 벗어진 채로,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마당을 살피던 허준의 모습은 이전에 연희를 찾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황색 도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그의 마음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도 퇴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원에 닿은 하루
누군가는 늙은 허준의 옷과 기다리던 연희의 옷이 하얀 것으로 봐서 허준이 죽음에 다다라 저승세계, 피안의 세계로 넘어간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필자는 허준이 죽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고자 한다.
허준과 같이 살 때, 연희는 밝은 빛깔의 옷으로 바꿔 입은 것과 달리 허준의 옷은 바뀌었어도 대체로 어두운 색깔이었다. 연희가 죽은 후 동의보감을 저술하기 시작하면서 허준의 옷 색깔은 노년으로 갈수록 옅어진다. 그리고 의서를 완성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허준은 하얀 옷을 입고 산을 오른다.
필자는 허준의 옷 색깔이 어두운 까닭을 자신이 연희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하는 마음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연희가 떠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연희와의 기억을 동의보감에 담아내기 위해 다 쏟아부었기에 더 이상 색깔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기억이 흐릿해지고 눈도 희미해지던 어느 날, 허준은 흑림에서 보았던 연과 같은 연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그 연이 묶여있던 집으로 들어가면서 황색 옷으로 바뀐 것은 그 옷이 흑림에서 연희를 만날 때 입고 있었던 옷이기 때문이다. 즉 묻어두었던 첫 만남부터의 기억이 뚜렷하게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마당에 펼쳐져있던 다양한 색깔의 천은 연희가 죽으며 했던 약속,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와의 소중한 기억은 내가 간직할게'를 지켰음을 보여준다. 연희는 허준과 보내며 입었던 밝은 옷들의 기억들을 집 한 가득 빛깔로 채워놓았다.
함께라는 안도감
사람의 삶이란 무엇일까.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사람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작가가 보인 사람의 삶을 고통의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리며 서 있는 들풀 같은 것이라 보았다. 풀만 가득한 들에 바람 잘 날은 없지만 들풀은 항상 같이 누이고 같이 일어나며, 같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것을 꿈꾼다. 그중에 갑이라 할만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갑과 을, 을과 갑. 이런 사람 관계가 힘들어지는 세계이지만 어느 때보다 관계에 고파진 시대를 산다. 아무리 혼자가 편해도 과연 관계의 소중함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혼자 남겨질까 봐서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더 이상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관계 앞에서 두려워하는 까닭은 당신이 영원히 혼자가 되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 편에서 우리 보통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준다. 죽음까지도 넘어선 영원한 관계, 잊히지 않는 기억, 마지막이 없는 첫날의 기쁨을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는 바람을 타고 푸른 들풀 위로 연이 나부끼고 있다.
열린 결말
연희가 허준 대신 희생수를 마시며 했던 말대로 '그 날들의 기억이 간절한 그리움이 되어' 둘은 다시 만났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결말이 갈리지만 개인적으로 둘 다 맞다고 보았다. 분명 연희는 죽었고 40년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던 허준도 죽어서야 만났지만 결국 둘은 재회했다. 변하지 않는 사랑과 저주를 이겨내는 희생을 기억했던 오랜 시간을 넘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