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노력보다 선행하는 선택, 공감 이전의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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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소유할 수 없다
술법으로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홍주에게 최현서 대감이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술법을 전수받을 때부터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도술을 익혀야 한다는 그의 충고를 홍주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더 가지기 위해 배우고 자신을 지키고, 더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배우는 도술이라 생각하는 홍주에게 술법으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최현서는 그런 홍주에게 도술로 가질 마음이라면 진심이 아니라고 답한다.
어떤 것으로도 마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 무엇으로도 진심을 살 수 없다는 한 명제가 이 극의 줄거리에 숨겨져 있다. 홍주가 연희, 허준 그리고 풍연과 다르게 행동하는 이유는 이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이다.
과거 최현서에게 도움을 받은 홍주였지만 자신이 사랑하던 그의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처럼 상대를 지키려 자신을 포기하기는커녕 소유하려 한다. 결국 홍주는 최현서 대감의 죽은 육신을 살려놓지만 '내가 원하는 너'라는 껍데기만 얻었을 뿐이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는 재주
최현서 대감은 홍주를 살려 준 과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죽어간다. 홍주의 회상 장면에서 그녀에게 너는 많은 재주가 있으니 다시 살아보자고 말했던 최현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마음과 달리 자신을 욕보인 자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경고하던 욕심과 이기심을 그녀는 버리질 못했다. 드라마 속 흑주술은 사람의 약하고 어두운 마음을 파고든다는 특성을 지녔는데 이러한 흑주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홍주 또한 흑주술의 피해자다. 그녀도 어두운 기억으로 약해진 마음을 돌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재주를 가졌지만 마음을 고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홍주였다.
이유 있는 악역
홍주 자신의 만행이 선조 앞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그러자 자신이 겪었던 왕실 사람들의 속 좁은 생각과 그들에게 토사구팽 당했던 경험을 나열한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은 왕실의 편협한 결정을 당당히 고발한다.
사람들을 해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악역인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부분일 것 같다. 아집으로 권력을 추구하던 왕실 사람들의 도구로 항상 이용당하던 홍주가 자신의 가련한 인생을 구하려 애쓴 발버둥이 보이기 때문이다.
선택
아이러니하게도 홍주 덕분에 주인공들의 선택이 빛을 발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과 조심스럽게 도우려는 세밀함, 그리고 자신을 내던지는 희생으로 상대방을 지켜내려는 결정은 직선적이고 일방적인 홍주의 선택들과 다르다.
곰곰이 따져보면 저주나 주술, 결계와 같은 판타지적인 요소로 내용을 채워가는 중심인물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허준이 홍주의 처소에 잠입에 '흑단검'을 집으며 보았던 환영은 아픈 기억을 모아 놓은 대표적인 장면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가치를 부정하고 존재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기억이 줄지어 나타나 허준을 괴롭힌다.
하지만 허준은 홍주와 달리 흑주술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숨겨진 약한 마음들이 그를 사로잡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아픈 기억들 사이에서 연희와의 첫 만남을 언뜻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허준은 연희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낸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흑단검'을 빼앗으러 오기 전 연희와 나눈 대화에서도 연희가 허준에게 중요한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연희를 자신의 인생의 버팀목이자 살아갈 이유로 마음에 품고 있다.
'벼랑 끝으로 몰리는 네가 나 같아서'라는 말에 담긴 허준의 공감과 상대를 지키려고 희생은 홍주의 마음과 다르다. 두 인물 모두 많은 재능을 가졌고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모습, 다른 역할로 살아간다. 이 설정이 삶이 재능과 노력의 차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이 작품에 깔려있다고 필자가 생각하는 이유다. 이 이야기는 아픔을 겪은 이들의 삶을 가른 결정적인 요소는 노력이나 재주가 아니라 선택임을 말하고 있다.
존중하게 하는 공감
상대방도 나와 같을 수 있다는 공감은 상대를 존중할 수 있다. 저주가 걸렸든 신분이 천하든, 내 앞의 사람의 상태에 놀랄 수 있지만 공감하며 마음 아파할 수도 있다. 허준이 하얀 머리로 변한 연희를 보고 처음 가졌던 마음처럼 말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꼬집어내기보다 그런 점 때문에 힘들었을 타인의 무언가를 공감해줄 수 있다.
이런 공감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게 한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감추고 싶을 정도로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감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감은 내가 겪는 일상조차 누군가의 도움으로 굴러간다는 생각까지 미칠 수 있다. 밤늦게 일하는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정시에 도착하려 애쓰는 버스기사 아저씨, 출근하는 시간보다 일찍 나와 바삐 청소하고 사라지는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서로의 의미
연희와 허준도 처한 신분과 저주라는 현실을 낙관하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그들이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서로에게서 나왔다. 이전 '생각 편'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들었던 위로의 말로 살아왔던 힘은 다시 서로를 향한다.
덕분에 이들은 살아간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삶의 이유를 찾는다. 나의 넘침으로 너의 부족을 채워주는 행복을 안다. 이 행복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려는 시도에서 시작한다. 부족함을 결핍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도와줘야 할 상태만으로 바라봐주기에 상대를 없애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동하는 소원, 조심스러운 사랑
연희가 행복하길 바라며 풍등을 날렸던 풍연은 지난날의 바람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지만은 않았다. 간절한 마음과 소원을 지켜내기 위해 연희에게 오해를 받는 선택의 순간들을 감내한다.
반면 허준과 연희는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한다. 그래서 각자가 이해하는 바를 쉽게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본인의 생각이 있을 때에는 도리어 말하기를 아낀다.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기보다 듣고 무엇을 말할까 보다 어떤 말을 아낄까 고심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청춘들의 사랑만으로 이해하기엔 아까운 줄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답답한 상황과 풋풋한 선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인물들을 보다 보면 사랑이 주된 이야기가 아니라 청춘이 중심이 된 드라마 같다. 그리고 청춘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한 때 평생 청춘을 꿈꾸며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도 소소하지만 여전히 지켜야 할 선택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