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보감, 그 다섯 번째 생각

도망치는 사람들

by 쓴쓴
첫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84
두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87
세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92
네 번째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95
마지막 생각 https://brunch.co.kr/@enormous-hat/107


누가 저주를 받았나


흑주술을 잃어 감옥에 갇힌 홍주는 혈맹을 맺은 최현서 대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사람들의 추악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흑주술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제 흑주술이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탓하는지 보라고 말이다. 이후, 상황을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홍주는 계략을 꾸며 백성 사이에 도는 역병이 공주에게 내린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좋은 왕이 되고자 했지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올바른 선택을 피해왔던 선조는 진실을 알면서도 공주를 화형에 처하라 명을 내린다. 용상을 지켜내려면 공주를 죽여야 한다는 홍주의 감언이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제야 홍주의 진면모를 본다. 홍주가 지닌 진짜 무서운 힘은 흑주술이 아니라 사람의 약한 마음을 휘두를 줄 아는 화술이었다.


허준은 화형이 내려진 연희를 구해내기 위해서 선조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백성들 하나하나를 살펴 역병의 원인을 찾고 낫게 하겠다는 그의 말을 선조는 막는다. 타인을 생각하는 자와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자가 나누는 대화는 인정을 요구하는 이의 일방적인 제압으로 끝이 나려 한다.


허준은 다시 선조에게 청한다. '백성들의 삶이 고단하여 공주마마 탓을 하는 것일 뿐인데 어찌하여 덮어두려고만 하십니까. 백성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보시고 해결책을 내어주십시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선조의 반응은 싸늘하다.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마라. 나는 이 자리를 목숨을 다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허준의 부탁을 거절하기에 적절한 대답도 아닐뿐더러 자신은 구해도 백성을 구할 마음이 없다는, 왕이 해서는 안 될 대답이다.(실제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과 도읍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도망갔다. 다만 명나라로 넘어가진 못하고 의주에 머물렀는데 유성룡의 간언으로 머뭇댄 것일 뿐이었다.)



대화하지 않는 선조: 산천제를 드리는 이유


'대비심씨'의 요청으로 시작된 '산천제'이지만 선조는 백성들에게 돌고 있는 역병을 치료해주려 허락한 것은 아니다. 공주를 소문에서 구출하려는 대비의 바람과 잃을지 모를 용상을 지키려는 왕의 불안감이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선조가 나쁜 소문은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안위뿐이다.


산천제를 드리는 장면에 백성이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은 제작비가 적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을 주목해 보면 병든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굳이 해석하자면, 역병으로 몸져 누은 이는 나올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참가 한 백성을 병증이 심해지지 않아 아직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면, 백성이 적게 나온 장면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병을 고치고 싶은 이들만 나오지 않았다. 연희가 염동력을 쓰자 어디 숨어있었는지 병에 걸리지 않은 백성들이 갑자기 소리 지르며 나타난다. 모인 백성들 중에는 자신의 병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해괴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불안이 문제였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비심씨는 소통할 줄 아는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녀도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위해 선택한 결정이기에 한계가 있다.


그 와중에 막상 연희는 소외되어 있다. 연희도 백성의 상태와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그녀의 저주가 아픔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다. 왕실의 외면과 이기심 때문에 고통받아 온 그녀를 진실되게 이해하는 사람은 허준 외에는 없다. (왕실도 그녀에겐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암시가 산천제에서 드러난다. 대화의 부재, 소통의 부재가 바로 왕실을 대표한다.)


그러기에 허준을 공격하는 수발 무녀들의 공격에 연희가 염동력을 사용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녀가 마녀가 아니라는, 얼어붙은 심장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를 볼 수 있는 인물은 그 자리에 없었다. 백성들이 마녀를 보았다며 공주를 잡으려 했기에 연희와 허준은 급히 도망가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한 홍주의 계략이 어딘가 현실과 닮아 있어 무섭다.



도처에 있는 악: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


정의는 처음부터 타인을 향한다. 정의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의 보호와 옳지 못한 것을 향한 단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정의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타인에겐 폭력이 되는 것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정의는 나를 포함한 만인으로부터 만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만 지켜질 수 있다.


그러기에 정의는 사랑과 같다. 사람을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옳지 못한 일들이 매일 들려지는 어려운 시대여서 정의가 날카로운 칼로 보이는 시대를 살지만 필자의 시각에서 볼 때 정의는 서로를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면에서 허준과 연희는 정의를 지켜왔다. 언제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홍주의 말에서 알아챌 수 있는데, 연희는 허준과 함께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왕실 사람들을 도리어 흑주술에서 구해주었다. 하지만 사랑을 베풀던 그들은 왕실의 권위, 나라의 안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심에 쫓겨 숨는다. 시청자는 도망가는 그들 또한 백성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역병이 도는 그 시기, 나라에게서 쫓겨난 백성.


허준과 연희가 겪는 어려움과 역병이 도는 사태를 흑주술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그것은 맞추기 쉬운,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과녁일 뿐이다. 홍주의 말대로 왕실 사람들이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저주가 내려지기 전에 마음을 돌렸더라면, 아이를 죽이라는 말에 조금이라도 흔들렸더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들 모두를 괴롭히는 악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마치 마음에 숨겨진 씨앗과 같을 것이다. 숨겨져 있지만 자라기 시작한 줄기를 잘라내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느새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을 구축한다. 악역을 맡은 홍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내 이용하는 모습이 그런 악의 속성을 닮았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태어나고 버려지다


어찌 되었든 왕실은 연희를 버렸다. 왕은 허준의 도움으로 흑주술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자 역병에 도는 소문을 잠재우려 공주를 버린다. 토사구팽인 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뜬금없이 역병이 돌았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역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창궐했다는 설정을 감안하면 왕으로서 살펴야 할 백성들의 고통을 선조가 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명받지 못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돌이켜보면, 연희와 허준이 선조에게 해왔던 간언을 기억할 수 있다. 연희는 선조에게 백성의 아비로서 마음을 굳건히 하여 주변 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사실을 바로 봐야 한다고 말해왔다. 허준은 총명탕을 먹은 선조에게 좋은 왕이 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럼에도 왕은 그들을 죽이려 든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은 공감할 마음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도리어 쓸쓸하고 불안한 마음만 남겨주었다.



사소한 것들


홍주는 왕실의 무능과 포악함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흑주술을 잃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줄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약한 마음을 불어넣은 말이다. 그녀의 복수심에 가득 찬 말은 시청자에게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녀 말대로 다 죽이고 다 쓸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도망친 연희는 허준에게 말한다. 저주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허준은 대답한다.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만나서 지금처럼 함께하는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었을 거야.


말이라는 사소한 것이 담아내는 사람의 생각은 같은 상황도 다르게 만든다. 저주는 존재하고 위험은 여전하고 복수심과 이기심은 여전히 사람을 미치게 하고 있지만 허준의 말처럼 평범한 것,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흘러가버릴 것들을 막아낸다.



붉은 도포로 살았던 솔개


긴박함과 반전의 묘미로 극을 전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이었던데 반해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한 솔개였다. 실제로 극 중에서도 솔개는 붉은 도포가 아닐 때에는 중요치 않은 주변 인물로 그려진다. 어쩌다 홍주의 무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허준의 추적수사에서 솔개의 출신은 이미 밝혀졌었다. 그리고 마치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듯이 너무도 허무하게 풍연을 구하려다 죽는다.


자신 앞에서 눈을 감는 솔개를 보며 울부짖는 풍연의 회상 장면은 그녀 또한 아픈 청춘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언제 어디로 자신이 팔릴지도 모르는 고아촌에서 거지로, 고아로 살던 그녀를 풍연이 거두었다는 과거에서 이어져 그를 그림자처럼 지켜주는 벗으로 살다 다시 그를 위해 죽은 삶은 허준과 연희만큼이나 굴곡진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