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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랍 애미 라이프 Mar 13. 2024

어중이 떠중이들의 나라


그간 이야기한 기름국의 모습은 주로 '선량하고 신실한 사람들, 강하며 권위 있는 정부,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와 같은 모두가 꿈에 그리던 유토피아적인 부분이었다면 이제는 이면의 모습을 꺼내어보고자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을 해보자면, 지난 시간 동안 이 나라와 삶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적어대는 마음의 한편에는 스스로를 세뇌하고 싶었던 이기심도 자리 잡고 있었다. '괜찮아. 그래도 여기는 이런 부분이 참 좋고, 이런 근사한 사람들도 있잖아. 좋은 것만 보고 받아들이자.' 하며 말이다.


실상 이사를 와서 첫 1년은 매일매일 울고 싶었고 여전히 지금도 울컥하고 올라올 때가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꽤 많은 올드 두바이와 금시장을 지나는데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하이! 코레아~ 빨리빨리”를 외쳐댔다.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빨리빨리'라니.

이놈의 한국인 성질머리는 여기서도 유명하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우리에게 빨리빨리가 있다면 아랍에는 ‘인샬라’가 있다. 인샬라를 곧이곧대로 번역하자면 ‘알라(신)의 뜻대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하늘에 맡기고 이를 따르겠다는 순종적인 의미가 있다. 의미만 놓고 보자면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직접 겪는 '인샬라'는 사람 피를 말리게 한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보자.

지은 지 10년이 한참 지나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우리 집에 큰 공사가 필요한 건이 생겼다. 에어컨 배관이 막혀 이대로 두면 누수가 생길 것이라는 엔지니어는 지금 당장이라도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계약에 따라 수리를 해줄 의무가 있는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개인도 아니고 나름 이곳에서 이름 있는 걸쭉한 은행의 소유인데도 담당자가 일처리를 귀찮아하며 차일피일 이를 미루고 있는 것이다.


집뿐이 아니다. 고장 난 가전 부품 여부를 확인해서 연락을 주겠다는 LG 서비스센터도 이러고 학교 행정실도 이러고 공공기관도 이러고 병원도 이러니 뭐 이건 대환장 파티다. 이런 식으로 일을 미루면 내 일이 다른 사람의 일이 된다는 것을 체득한 이곳 사람들의 특유의 업무 방식이니 말 그대로 '인샬라'다. 일머리가 있고 책임감이 있는 담당자를 만나면 일이 처리되고 아니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다.

  

ENFP임에도 한국인 패치를 단 나는 정해진 기간에 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편인데 나와는 달리 이 사람들은 늘 여유 있고 자신만만해 보인다. 내가 아무리 따져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우리나라였으면 담당자가 '죄송합니다. 고객님.'을 수도 없이 외칠 상황임에도 '미안하다.'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AI로 만든 참고 이미지


대체 왜 이럴까?



UAE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평균 거주 기간은 약 7.5년이다. 외국인 비율 90%에 그들의 로테이션 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과반수는 몇 년 일 하다가 이 나라를 떠난다는 셈이다. 지난 3년 간 내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의 들고 낢이 있었다. 이곳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친구들의 잦은 전학이 익숙하다. 새로 사귀는 사람들과도 '여기 얼마나 계세요?'라고 묻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니 말이다.


뿌리를 박고 살아갈 나라와 잠시 머물다가 떠날 나라에서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부터 수습하는 돌려 막기 식의 업무처리가 만연해 있다. 그래서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를 하려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이 직접 나서서 수도 없이 연락하고 찾아가고 챙겨야만 한다. 이런 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그냥 대충 살다가 한국가지 뭐.' 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어느새 나도 이곳의 '어중이 떠중이' 한 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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