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처럼 양보만 하다간 루저가 될 거라고요?
'걔는 음... 착해....'
정말 그 혹은 그녀가 착할 때도 쓰지만, 완전히 매력적이거나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돌려서 말할 때도 쓰곤 한다. 인간관계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되어 손해만 보다가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마는 어떤 불쌍한 사람을 향해 '그 사람 참 착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콤플렉스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다 내 것은 놓친 그 불쌍한 사람의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며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특성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를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졌다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착한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사회가 전쟁으로 치달아 다 같이 멸망하지 않고 꿋꿋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님이 인정을 안 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나는 착한 어린이였다. 주어진 상황에 불평하는 법이 없었고, 뭐를 달라고 해달라고 우기는 일도 없었다. 반찬투정, 옷 투정 같은 것 없었으며. 놀러 가자, 과외를 시켜달라며 때 쓰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있으면 있는 대로 만족했다. 나름대로 좋은 점과 장점과 그런대로 견딜만한 점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어 감사하려고 노력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척 언니와 오빠가 운영하는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우리 집은 학원에서 멀기 때문에 학원셔틀이 지나가지 않았고, 나는 '학원을 공짜로 다니게 하주는 것이 어딘데...' 하면서 먼 길을 빠짐없이 다녔다. 반드시 영어와 수학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1년간, 총 4년간 아파서 쓰러지지 않는 이상 내 사전에 지각과 결석은 없었다. 공짜로 학원을 다니던 나는 셔틀버스나 장학금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선생님들 눈치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 정말 듣고 싶었던 과학 수업이나 특목고 입시반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특목고 입시반에 다니는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던 영문법 교재를 보여달라고 하여 몇 장씩 넘겨보며 씁쓸함을 달래곤 했다.
학원에서 공짜로 배우느라 가슴이 쓰라렸다는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냥 조용하게 학원에 다녔다. 너무 피곤하고 먼 학원 가는 길이었지만,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했고, 선생님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으며, 어떻게든 그곳에서 잘 적응하여서 나의 성적을 올려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항상 돈 걱정과 우리들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에 나까지 짐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집안의 기둥'이 됨을 자처하여, 공부를 꽤 열심히 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내가 원하는 학과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영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시는 내가 벌었던 돈이 우리 집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스트레스성 위염, 성대 결절과 맞바꾼 나의 수입은 모두 부모님께서 관리하셨고,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썼다.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친한 친구가, 부모님께 돈을 드리지 말고 너도 너의 인생을 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족들을 모른척하고 나 혼자 훌쩍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물론 나도 답답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은 나를 유능한 영어 강사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가족 때문에 미국 유학을 포기했다느니, 그래서 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니까 말이다.
'착한 나의 성격'에 홀딱 반했다는, 나보다 더 성품은 좋으나 더욱 실력이 있고, 역시 돈은 별로 없었던 한 남자와 결혼하여 꽤 오랜 결혼 기간 동안 한결같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삶 속에서 나의 선택에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의도만큼은 분명 선했기에 지금의 내 모습이 만족스럽다.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때, 부모님께 친척이 운영하는 학원에 공짜로 다니고 싶지 않으니 나를 돈을 내고 다 닐 수 있는 다른 학원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면 어땠을까? 또 만약 그때 일하면서 벌었던 모든 돈을 모아서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갔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학원에 보내줄 수 없는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상처를 입고, 결국 집에서 혼자 공부하게 된 나는 탄탄한 기초를 쌓지 못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혼자서 자유롭게 유학을 갔다 하더라도, 나는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지금처럼 깊고 친밀한 형제애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학 가서 학위를 받고 지금쯤 모 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번 어린 시절의 나로, 유학과 한국생활을 기로에 놓고 고민했던 그때로 돌아가도 나의 선택은 똑같을 것이다. 참 감사하게도 나의 착한 마음은 대학교 합격증, 영어 강의 실력, 그리고 좋은 배우자와의 안정된 결혼생활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착하게 산 내 인생이 그렇게 마음에 한이 되거나 억울하지만은 않다.
이 글을 쓰며 '그러니까 내가 착해서 내 덕분으로 나와 가족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라는 교만한 자랑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답답해 보이고, 손해만 보는 듯한 '착한 사람'에 대한 관점을 약간 달리해보자는 것이다. '착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착함'이란 힘든 상황이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뜻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환경에서도 어떡해서든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이라도 찾아내어 삐죽이 고개를 내밀어 기어이 햇빛을 흡수하여, 밝고 건강해질 수 있는 적극적인 마음이기도 하다. '착함'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은 생각할 줄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망쳐놓은 세상에 아름다움과 이타적인 마음으로 예쁘게 가꾸어 놓은 세상이 합쳐져서 평균적으로는 '결국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마음이다.
나는 자녀들에게 '바보같이 양보만 하다가는 이 세상에서 루저가 되고 말 거야. 일단 네 것부터 챙겨. 실속 있게.'라며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딸이 자기 공부시간이 아까워서 친구가 물어보는 문제에는 '몰라'라고 짧게 대답하는 아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친구가 수학문제를 더 쉽게 이해하게 해 주려고 먼저 공부하고 나서 차근차근 알려주는 속 깊은 아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들은 같은 반에서 놀림당하는 친구랑 함께 놀고, 어울릴 줄 아는 멋진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도 혹시 따돌림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약하고 여린 친구를 놀리거나 피하는 못난 아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친구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 흘려줄 수 있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두 개의 과자 중 무려 한 개를 나눠 줄 수 있는 품이 넓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소중한 자녀들에게 대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얘들아, 있잖아, 원래 착한 사람이 좀 더 애쓰고,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