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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Aug 11. 2022

관찰하는 습관

다른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자 즐거운 취미이다. 돈도 들지 않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눈만 뜨고 있으면 가능하다. 참으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다 보니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최근 놀이동산에서는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쳤다. 어쩐지 낯이 익은듯했는데, 거짓말 보태어 약 3초 만에 그분의 이름이 생각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10년 전 같은 직장에서 약 3개월 정도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나의 반가운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시더라?' 하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단 몇 초 만에 십 년 전 직장동료의 이름이 생각난 나는 묘한 성취감과 우월감마저 들었다. 


얼마 전에는 장염 증세로 동네 내과에 갔다. 그 병원은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세심하게 진료를 하시는 편이라 찾는 손님들이 많고 대기시간 역시 꽤 길다. 원래 그랬기에, 그날도 나의 차례가 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병원 안의 사람을 관찰하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먼저 간호사들 세 명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고, 다른 한 명은 순서대로 손님의 이름을 부르며 처방전을 주고 카드 결제를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대장내시경을 받을 손님에게 약 복용 방법을 천천히 설명해 주느라 바빠 보였다. 과연 간호사들은 진정한 멀티태스킹의 귀재들이었다. 심지어 그 바쁜 와중에 어느 할아버지는 아내를 대신하여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으러 오셨는데, 안타깝게도 아내의 주민번호를 정확히 모르시는 눈치였다. 할아버지가 틀린 주민번호를 계속 말씀하시고, 간호사는 그때마다 '그런 분 없는데요.'를 답하는 대화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검사받은 당사자가 병원에 오셨다. 할아버지를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마음은 딱 이런듯했다. '아이고 이 인간아.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할머니의 눈빛에서 분노의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주민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난감한 할아버지, 짜증 난 할머니, 그리고 열심히 주민번호를 입력하고, 검사 결과지를 출력하시는 인내심 강한 간호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죄송스럽게도 번거롭고 짜증 난 그분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한 편의 즐거운 시트콤처럼 느껴졌다.


간호사들을 관찰하다 보니, 병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그분들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사다 드릴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다른 손님이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눠주며 "수고 많으신데 좀 드셔 보세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친절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좀 친절해져 볼까?' 하는 고운 마음이 들곤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심성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병원에는 어느 4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딸 혹은 아들의 진단 결과를 듣고 나오는 상황 같았다. 남자는 진료실에 들어갈 때보다 확연히 굳은 표정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OO이 소견서 받았어. 대학병원 가보래.'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한숨 한 번을 크게 쉬고,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힘이 빠진 뒷모습이 안타까웠다. 마음으로 아이가 큰 병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나의 가족도 몇 년 전, 동네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큰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본 기억이 있기에 착잡한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에 근거한 '관찰'이라는 습관은 지루한 시간을 달랜다는 것 외의 또 다른 장점이 있다. 바로 수입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관찰 덕분에 나는 일을 좀 더 센스 있게 할 수 있었고, 수입도 덩달아 늘어나곤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학생들의 눈빛과 입모양과 목소리를 통해 학생들의 영어 습득과 흥미 유무를 비교적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알맞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학부모와의 소통도 어렵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저는 우리 아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즐기기만 해도 좋겠어요'라고 하는 학부모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도 파악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이 듣고 싶었던 답변을 할 수 있었고, 나와의 상담이 학부모의 타는 속을 시원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학생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영어강사가 되었다. 이처럼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은 수입으로 이어져, 나의 용돈, 동생들 용돈, 어학연수 비용, 결혼 비용을 마련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이렇게 사람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데에는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 탓도 있다. 아버지는 작은 개척교회 목사이셨는데, 어린 나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나는 그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또래 친구들부터 중학생, 고등학생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 결혼한 아주머니와,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분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재빠르게 기억해서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미리 그분들의 눈매, 머리, 키, 분위기, 표정들을 세심하게 관찰해 놓으면 시간이 흘러도 자연스럽게 누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경험과 관찰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는 교회의 성도들 중 누가 다음 주에 교회에 나올지, 아니면 다른 교회로 옮길지 대해 어느 정도의 예측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나의 예측은 열 번 중 여덟 번은 맞았다. 그래서 매우 좋아했던 얼굴이 하얗고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를 자주 입던 교회 선생님과의 이별도, 손에 박하사탕을 꼭 주시던 할머니 권사님과의 이별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인한 예민한 관찰력도, 기억력도 불편했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에 대한 신경은 끄고, 오직 나에게만 시선을 집중하여 살고 싶었다. 어쩌면 남들보다 빠르게 이별을 알아차리고, 먼저 서운해해야 했던 어린 나의 섬세한 감수성이 슬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고맙고도 다행인 것은 이제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에 대해, 그들에 대한 나의 시선에 대해 꽤 관대해졌다는 사실이다. 아내의 주민번호를 못 외우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안타깝게, 아이의 소견서를 받아 든 아버지의 마음은 쓰라리게,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간호사의 모습은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아마도 그 시점은 어린 시절 내가 했던 경험이 나의 시선을 좀 더 부드럽게, 관대하게, 세심하게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인듯하다.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한다.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심 어린 시선이 다른 이들의 아픈 마음을 공감해 주고, 응원해 주고, 용기를 주는데 잘 사용되었으면 좋다는 생각 말이다. 이렇게 기특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다니. 역시 쓸모없는 경험은 없나 보다. 그렇다. '경험 탓'이 아니라 '경험 덕분'이리라. 이번 주말에는 그때 함께 교회를 청소하고, 부활절 계란을 하루 온종일 포장하던 나의 동지요, 붙박이 인력이던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안부 전화 한 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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