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N잡 만화작가의 문하생이 되다.

by 김창순


누군가 매일 보던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KakaoTalk_20250531_101323658.jpg <캔디 캔디> 외로워도 슬퍼도 캔디는 울지 않는다



언니가 사라졌지만 난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고 학교에 갔다. 장례식을 마치고 간 학교는 좀 안쓰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선생님과 옆반 뜸하게 지내던 친구가 달려와 '괜찮아?' 물어보는 정도였다. 달라진 건 없다.

매일밤 언니가 돌아오는 꿈을 꾸긴 했지만....... 괜찮다 외로워도 슬퍼도 캔디는 울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빠르게 철이 들어버렸다. 상실의 고통에 대해 알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라는 놈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리고 가장 힘들어하실 부모님을 보면서.

그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지만 왠지 나라도 부모님을 힘들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철없이 칭얼대고 무언가 요구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어린 내가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리지 않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꾸 철없이 뭔가 사달라고 조르는 막내도, 몸이 약한 언니가 자꾸 엄마에게 기대는 모습도 못마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와 딸의 유대감 비슷한 대화였는데, 그때의 나는 그런 것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죽은 둘째 언니는 상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4H라는 서클에 회장이기도 했고

서클 여름방학 축제에 놀러 가본 적도 있었다. 신세계!!

여고 언니들의 파워풀한 엠씨해머의 춤도 멋졌고, 밴드부, 연극, 장기자랑을 하는 것도 신나고 재밌어 보였다.

공부도 재미없고,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나는 그 당시 언니가 다니던 상업고등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상고를 가기 위해서는 반에서 30%(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어필이다 ㅎㅎ) 안에 들어야 했으므로 중2 때부터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리고 언니가 다니던 학교에서 무언가 언니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도 있었던 거 같다.

그렇게 중3 어느 날 어느 정도 시험도 마무리되고 학교 입학도 결정되고 나니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학생을 누가 써주겠는가! 동네 치킨집도 어슬렁 대보고, 분식집, 옷가게도 쓱 둘러보지만 작은 동네에서 아르바이트 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예쁜 기억이 있는데, 우리 집 앞 4차선 대로를 건너면 아기자기한 상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상가 사이로 쭉뻗은 길을 내려가면 시장통이 있고 그 사이에 작은 만화가게가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나의 아지트. 그날도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은 맘으로 어슬렁대던 나는 만화가게로 들어섰다. 나의 안식처 해피바이러스~~

신나게 자리를 잡고 그 당시 좋아하던 김영숙이라는 작가의(기억의 불확실성으로 작가는 정확하지 않다)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1권을 다 읽어 갈 때쯤 마지막 장에 만화작가 문하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만화작가의 문하생이라니!!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수업시간에도 자주 만화를 그리고, 친구들의 주문을 받아 캐릭터를 그려주기도 하는 학생이었다.

용기를 내보면 혹시 모른다. 광고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를 눈에 각인하고 가게를 나와 근처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가슴이 꿍꽝대고 손이 떨렸다. 소심한 내가 시도하기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도전!!

땡그랑 십원자리 동전 2개를 넣고 또르륵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찾아간 곳은 잠실에서 조금 들어간 조용한 주택가였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생이 어떻게 혼자 거길 찾아갔는지 대견하다. 그 용기에 박수!

지금도 그날의 기억은 손가락에 남은 아이스크림처럼 끈적하게 남아있다.


그곳은 지하 공간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넓은 거실과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는 소파 그리고 한가운데 앉아계신 꿈에 그리던 만화가 선생님. 애정하던 만화책으로 뵐 때는 여자분인 줄 알았다. 순정만화이기도 했고, 그림체도 여자가 그린 것처럼 예뼜으니까. 그러나 생각과는 반대로 나이 지긋한 남자 어른 이셨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개량 한복을 입으셨던 기억이 있다. 아, 만화에는 항상 긴 머리에 잘생긴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했었는데...... (뭘 기대한 걸까?ㅎ) 선생님은 그날 가져간 중학생의 그림을 꼼꼼히 봐주셨다. 그리고 주말마다 그림을 배울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눈물 나게 감사한 꿈만 같은 일이다!


그다음 주 신나게 잠실로 향했다. 작업실은 거실 한편 계단을 내려가면 있는 지하 공간이었다. 안방 정도의 크기로 벽에 책상이 쭉 붙어 있었고, 방 가운데 선생님 자리가 있었다. 내가 맨 처음 시작한 건 문하생들 자리 맨 끝에 앉아 만화 용지에 뾰족한 펜촉으로 선 긋는 연습이었다. 문하생들의 만화원고를 만드는 과정은 펜과 잉크로 선생님이 스케치해주신 그림에 펜선을 긋고 지우개질을 한 후 스크린톤을 칼로 오려 붙이면 한 장의 원고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문하생의 문하생이었던 나는 선배의 그림을 몰래몰래 훔쳐보며 연습 종이에 하루 종일 선을 긋는 일이었다. 곧고 균일한 굵기의 선이 나올 때까지. 인고와 끈기의 시간을 견디고 고등학생 만화가라는 타이틀을 단 유명한 만화가가 됐다면 참 좋았겠지만...... 내 사주엔 토가 부족하다. 끈기와 인내력 그리고 마무리!


딱 한 달이 되는 토요일 주말, 선을 긋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왔다. 펜촉에 검은 잉크가 굳어 아무리 굴려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나오라고 같이 놀자고. 만화의 뒷면은 빛이 들지 않는 무채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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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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