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쓴맛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을 번다는 건 프로가 되는 일이고 프로가 된다는 건 좋아하기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인내과 고통을 이겨내고 사회적 기준에 맞는 성취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당시 나는 어린 중학생의 마음으로 그 인내의 쓴 열매를 먹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의 패배감은 꽤 컸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한 도전에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만두었다는 것. 나 스스로에게 실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후로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어릴 때의 나는, 내가 도전한 일에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자주 힘들어했다. 어른이 되어보니 사람의 재능과 기질은 다르다. 나의 재능은 그림에 있었지만, 기질은 자유롭고, 어딜로 튈지 모르는 행동파 였으며, 엉덩이 힘보다는 아이디어에 더 특화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50이 된 지금, 나를 알고 그림과 작업을 유지할 수 있는 루틴을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다.
그 후 중학교 졸업을 하고 입학한 고등학교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당시 강북의 구시가지에 살고 있었던 나는, 동네를 벗어나 버스를 한참 타고 강남의 신도시 롯데월드가 있는 곳으로 등하교를 했고, 매일 북적이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등하교를 해야 했다. 버스는 정거장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고 변태아저씨들과의 몸싸움도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 후 새로운 것 또 한 가지는 학교 근처 대형 분식집들이었다. 동네에서 보던 작은 떡볶이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장이 높은 복층 한가운데에는 둥근 홀이 있었고 디제이가 음악을 선곡해 주는 카페 같은 대형 분식집을 가장한 가게들이 즐비했다. 어떤 곳은 하루 종일 tv에서 그 당시 유행하던 중국 누아르 영화가 상영되었고, 학생들은 영화를 아니 주윤발과 유덕화를 보느라 2-3시간씩 둘러앉아 즉석떡볶이를 먹곤 했다. 그중에서 우리가 자주 가던 ‘스크린’이라는 곳이 있었다. 대형분식집은 아니었지만 꽤 규모가 있던 곳이었는데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꼭 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알바신청과 면접을 보고,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가 끝나면 그곳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수다 떨고 놀던 곳에서 일도 하고 돈도 번다는 생각에 신났지만, 돈 버는 일이 어디 호락호락한가. 그곳에서 난 사회의 쓴맛을 처음 맛보게 된다.
처음 한 일은 테이블 번호를 외우는 일이었다. 가게 중앙과 외각의 둘러진 테이블이 꽤 많았는데 번호를 알아야 음식을 정확하게 서빙 가능했다.
두 번째는 많은 음식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 간단한 주문은 괜찮지만, 단체주문을 넣어야 하는 경우엔 많은 음식들의 종류(쫄순, 쫄볶, 짜떡등 비슷한 이름이 많았다ㅎ)
를 외우는 게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주문지와 펜을 들고 다니며 메모할 수 있었지만 가게는 항상 배고픈 학생들이 꽉 찼고, 한가하게 종이를 꺼낼 시간은 없었다. 게다 주방장은 40대 정도의 히스테릭한 여자분이셨는데, 주문을 잘못 넣거나 서빙을 잘못하면 엄청난 괴성이 날아오곤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는 건 어느 정도의 애정과 학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지만, 돈을 버는 곳 사회에서 듣는 야단은 냉정하고 날카롭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나는 것도 그곳의 다른 직원들과 친해지는 것도 내성적인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시기 학교에 가면 공부는 제치고 매일 엎드려 잠만 잤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이 본다면 학생신분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어때?라고 조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때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 아르바이트로 나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걸 배우며 한 뼘 성장했고, 스스로 번 돈으로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어떤 자세로 배워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