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맨 처음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용의자 X의 헌신>이었는데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학천재’가 짝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현행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완전범죄를 계획한다는 설정부터가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얼리티가 희박한 미스터리 소설은 별로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무랄 데 없는 트릭이지만 인정해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청년에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뇌를 이식하는 <변신>이나 사는 곳도 나이도 다르지만 모습이 꼭 닮은 두 명의 대학생을 등장시켜 복제인간 문제를 다룬 <레몬>을 읽었을 때도 이렇다 할 감흥은 없었다. 과학과 의학의 핫한 소재를 끌어와서 상상력을 ‘적당히’ 가미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히가시노의 소설은 나랑 안 맞는구나, 대충 파악했으니 앞으로 더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한 2007년 무렵의 일이다.
내가 다시 히가시노의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하 ‘나미야’)이 48쇄를 찍은 어느 해 초겨울부터였다. 일본 미스터리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도 북스피어에서는 고작해야 5쇄를 찍었을 뿐인데, 48쇄라니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종합 베스트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판권의 숫자를 코앞에서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궁금해졌다. 영화나 드라마에 이야기를 공급하는 외국의 소설들에 비하면 한국 소설은 경쟁력을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논의가 한창인 마당에 <나미야>는 왜 이렇게 잘 팔리는지 알아볼 요량으로 책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잡화점 우편함에 들어 있던 상담 편지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는 설정은 새로울 게 없었다. 다만 본격 미스터리 작가인 줄 알았던 그가 ‘힐링+판타지 소설’을 썼다는 게 의외였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대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중학교 때까지 책과 담을 쌓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를 읽으며 미스터리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정식으로’ 문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왕창 읽던 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가 데뷔한 것은 1985년, 스물일곱 살의 일이다. 이후로 사오 년에 걸쳐 암호나 밀실 등의 고전적 소도구를 이용한 본격 미스터리에 매진한다. 그의 작풍은 ‘이과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자신의 전공을 살려 도핑 문제와 스키의 점프 경기를 다룬 <조인계획鳥人計劃>(1989)부터 변한 듯하다. 위에서 거론한 <변신>(1993)도 계통적으로는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
하지만 “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메시지는 암호여야 하지? 범인의 이름을 정확히 써놓으면 안 되나?”라며 본격 미스터리의 뒤통수를 치는 듯한 대사가 등장하는 <명탐정의 규칙>(1996)이 발표되었을 때는 이게 과연 히가시노의 작품인지 의심하는 팬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독자들은 개그나 조롱으로 느끼기도 했으리라. 가족을 테마로 죽은 어머니의 영혼이 딸의 몸을 통해 되살아난다는 <비밀>(1998)과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 가해자의 가족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지>(2003), 범죄 피해자와 범인의 아들이 운명처럼 만나는 <유성의 인연>(2008)은 마음만 먹으면 울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독자들에게는 다소 미안한 표현이지만 이과적 감수성에서는 나오기 힘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엿장수 마음이라지만 작풍을 이렇게 홱홱 바꾼다는 게 가능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라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익숙한 캐릭터와 일정한 패턴의 설정에 안주하는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다채로움” 같은 수사가 의례적인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팔린다 싶으면 우려낼 대로 우려낸 사골의 뼈까지 쪽쪽 팔아먹는 작가가 있는 반면에 “얼마나 팔리든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계속 내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2011년부터는 시간에 쫓겨 퀄리티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연재 ‘방식’으로 장편을 집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담당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고 끝없이 수정하며 만족할 때까지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이듬해 3월 <나미야>를 발간한다.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일은 대개 분별력 있고 지식이나 경험이 많은 분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일부러 미숙하고 결점투성이인 젊은이들로 했”다고 강조한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미야>에서 가장 돋보인 설정은 미래에서 보낸 편지 속 고민을 상담해주는 역으로 미숙한 젊은이를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나미야>의 번역본이 출간되던 그 시점에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200만부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는 것도 우연치고는 묘하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내용만으로 <나미야>가 어느 날 갑자기 펑 하고 베스트셀러가 된 건 아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제대로 된 설명이 가능하다. 그 기간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확히 각을 재고 조금씩 궤도를 수정해 가며 매년 두 권의 장편과 두 개 이상의 단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태작은 없었다. 읽는 이에 따라 ‘이것은 걸작입네 아니네’ 하는 공방은 있었을지언정 수준 이하의 작품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덕분에 ‘하루에도 수십 권씩 소설이 쏟아지는 요즘 같은 때에 나처럼 평범한 독자는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일에 쫓기는 가운데 가까스로 짜낸 시간에 소설을 즐기고 싶다, 귀중한 시간과 돈을 재미없는 책에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 히가시노를 고르는 게 장땡’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독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구축되었던 것이다. 늘 일정 수준 이상의 장편 두 권과 단편 두 편을 30년 넘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써왔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과연. ‘히가시노=쓰기만 하면 팔린다’는 공식 뒤에는 이러한 대천재적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