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나는 이 영화를 케이블에서 방영할 때마다 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못지않게 <마틸다>를 떠올리는 형제자매님들도 많으리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원작도 이 사람이 썼다. 과연, 그러하다. 로알드 달은 아동문학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물론 나도 철석같이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한데 언젠가 그의 전기를 팔랑팔랑 넘기다가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됐다. 로알드 달이 영화 <007 두 번 산다>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거다. 동화작가가 대관절 어쩌다가 첩보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게 됐을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알드 달은 영국 공군에 입대한다. 조종사가 될 작정이었다. 훈련은 나이로비에서 받았다. 훈련용 탑승기는 ‘타이거모스’라는 이인용 경비행기였다. 195센티미터나 되는 로알드 달이 조종석에 앉으면 비행기 밖으로 머리가 튀어나와서 애를 먹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을 마쳤다. 당시만 해도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홀로 광대하게 펼쳐진 하늘로 올라가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풍경을 하느님의 위치에서 볼 수 있어 기뻐했다”고 한다. 사건은 훈련을 마치고 배치 받은 부대를 찾아가기 위한 첫 비행 때 벌어졌다.
그가 출발한 시각은 오후 6시 15분. 일몰까지는 1시간 15분이 남았고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부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니었다. 한 시간 넘게 비행했지만 사막 어디에도 내릴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휘관으로부터 좌표를 잘못 받았다’는 설과 ‘복엽기 글래디에이터를 처음 몰아봤기 때문에 생긴 조종 미숙’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연료가 바닥을 치기 직전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막 한가운데서 착륙을 감행한다. 비행기가 부서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몸뚱이는 격렬하게 조종석 앞으로 튕겨나가는 바람에 코가 얼굴 속으로 함몰되고 두개골이 파열되었다. 평전 <천재이야기꾼 로알드 달>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한 로알드는 1년간 병가를 얻지만 전쟁은 그를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후 워싱턴에 있는 영국 대사관의 공군 무관보로 발령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고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로알드는 여전히 전쟁을 반대하는 미국의 정치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각료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런 반전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임무는 맡는다. 즉, 영국의 첩보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미국인들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워싱턴과 뉴욕을 바쁘게 오가는 사이에 점점 더 거리낌이 없어지고 뻔뻔스러워졌다고 로알드는 회상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영국 대사관의 무관보 사무실로 로알드를 찾아왔다. 영국의 소설가 C. S. 포레스터였다. 워싱턴에 거주하며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던 포레스터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마침 미국의 주간지 <새터데이 이브닝포스트>에 글을 기고할 ‘참전용사’가 필요했는데 직접 사고를 겪고 워싱턴에 와 있던 로알드 달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에 포레스터의 소설을 읽으며 감탄한 경험이 있는 로알드는 고심 끝에 원고를 쓰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미숙한 조종사의 착륙 실패담은 적군의 총탄에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비행기를 노련하게 몰고 돌아온 영웅담으로 바뀐다. 로알드가 처음부터 대놓고 과장했는지 편집기자들이 극적인 방향으로 수정한 건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영국 공군의 성공적인 공습 이야기를 통해 미국의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글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글은 C. S. 포레스터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모두 만족시켰고, 덕분에 “로알드 달은 문학계에 데뷔했다”고 평전의 저자는 적고 있다. 로알드도 “살면서 처음으로 뭔가에 완전 몰두할 수 있었다”고 표현했을 만큼 글쓰기의 묘미랄까 창작의 즐거움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동-판타지 문학의 대가로만 알려진 로알드 달이 영화 <007 두 번 산다>의 시나리오까지 쓰게 된 데는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이언 플레밍과 짧게나마 함께 첩보원으로 활약하며 인연을 맺었다고 하니, 과연 작가의 뒷얘기는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