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스물다섯 번째
후추는 아주 꼼꼼하게 호기심이 많다. 이것저것이 다 궁금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를 소홀히 지나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면모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후추를 보며 알았다. 얕고 넓은 관심사에 특화된 나도 후추를 보며 궁금했던 한 장면에 조금 더 머물러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탁월한 나의 후추 선생님... 어쨌든 그런 이유로, 산책에도 박자라는 것이 있다면 후추의 산책박은 '삼보일킁킁'. 앞으로 쭉 나가는 산책은 후추에게는 별로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잠깐 걷다 멈춰 냄새 맡고, 잠깐 걷다 또 냄새 맡는 일의 반복이 지금 후추의 산책 패턴이다. 전에는 그것이 '좋은' 산책이 아닐까봐 걱정도 많았는데(과연 좋은 산책이란 어떤 것일까? 30분 산책? 새로운 길 산책? 나는 '후추와 내가 서로의 기분과 호오를 살피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바깥 활동'을 좋은 산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제 보니 얘는 그저 호기심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강아지였다. 매우 민감한 호기심 안테나를 가진 강아지랄까. 게다가 이 호기심 안테나라는 것이 나날이 발달한다. 요즘은 2주 전만 해도 그냥 지나쳐 나가기 바빴던 현관 앞, 그리고 집 앞에서 한참씩 머무르며 구석구석의 냄새를 맡는다. 거기에 어떤 재미있는 정보가 있는 거겠지. 후추보다 훨씬 질 낮은 수준의 감각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 번은 저녁 산책길에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시는 캣맘 분을 마주친 적이 있다. 후추는 그분이 어떤 목적으로 나오셨는지 모르니까 그저 예의 삼보일킁킁을 하며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분은 후추가 너무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그 인근에서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시려는 것 같았다. 후추가 지나가야 고양이들도 안심하고 나올 텐데. 눈치 없게도 후추는 그 근처의 풀 한 포기 한 포기의 냄새를 꼼꼼하게 맡고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 냄새가 나서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추를 지켜보며 하염없이 (서로를 의식한 채)서 있는 두 사람의 민망한 공기가 점점 번지고. 나는 그 분의 기다림이 신경 쓰여 "후추야, 가자!" 하며 살살 달래보았다. 그래봤자 뭐, 후추는 서두를 생각이 없다. 결국 캣맘 분이 웃음이 터져서는 "아이고, 강아지야.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이." 하셨다. 그 말에 "얘는 3보1냄새예요, 어휴." 하며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
후추의 관심사는 고양이, 지렁이, 각종 곤충들, 동네 강아지들의 오줌과 (없어야 하지만 늘 많은)똥, 꽃과 온갖 풀이다. 그것들의 냄새를 샅샅이, 그야말로 하나하나 맡아본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풀잎이라도 저마다 고유하게 다르다는 것을 냄새로 안다는 듯 정말로 풀을 하나씩 전부 점검한다. 매일의 변화도 감지하는 걸까. 어제 맡은 풀 냄새를 오늘 또 맡는다. 명탐정이 따로 없고. 그러니 산책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우스운 춤이 되기 일쑤다. 어느 비 온 뒤의 산책에서는 어쩐 일인지 풀숲이 아니라 그냥 길 한복판에서 한참을 킁킁대기에 이 근처에 뭐가 있나 살피다 올려다봤더니, 벚나무에 설익은 버찌들이 연둣빛을 하고 소담스럽게 매달려 있다. 그제야 보였다. 비를 맞아 떨어진 버찌가 바닥에 점점이 있던 모습을. 이야, 후추야, 네 안테나 사양 되게 좋네!
버찌 향기를 맡았으니 똥 냄새로 넘어와볼까. 후추는 단연 똥 찾기에 선수다. 길가에 숨은 똥을 찾고 싶으면 명탐정 후추를 부르면 된다. 풀숲에서 뭔가 발견한 듯 단호한 움직임을 보일 때 거기에는 어김없이 똥이 있다. 나는 이제 질색하면서도 그냥 후추를 내버려둔다. 다행히 후추가 대단히 대단한 깔끔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추는 우리집에 온 처음부터 목욕도 별로 싫어하지 않았고, 빗질은 되레 무척 즐기는 듯했는데 이제 보니 몸 단장을 살뜰하게 하는 강아지였다. 집에서 생활하는 후추의 모습은 1/3이 여기저기 털을 고르고 몸 단장을 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다. 그러니 다행히 똥도 호기심에 냄새를 맡는 정도고. 나는 그래, 후추 네가 재미있으면 됐지... 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래도 똥에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마, 후추야. 엉엉.)
그런 후추의 명탐정 놀이는 최근 방아깨비를 만나 절정에 이르렀다. 요 며칠 방아깨비가 많이 출몰해 후추는 잔혹한 사냥놀이를 즐기던 참이었다. 말끔한 연둣빛의 방아깨비는 통통하고 아주 예뻤다. 나는 후추가 자꾸 그 예쁜 방아깨비에 달려들어 그저 재미로 괴롭히는 게 너무 싫었는데 일단 후추가 방아깨비를 발견하면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녀석은 탐정이 아니라 빌런이다!
후추가 방아깨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간식을 잔뜩 주면서 주의를 돌리는 게 요즘 산책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아침.
명탐정 후추가 집 앞을 나섰다. 후추는 또 방아깨비를 찾는지 온통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내딛었다. 빌런인지 명탐정인지 모를 후추를 (다행히 방아깨비가 안 보여서)평화롭게 지켜보며 몇 걸음을 걸어 나갔다. 그때. 웬일인지 바닥에 누워 있는 작은 벌이 보였다. 보통 길바닥에 누워 있는 벌은 죽은 경우가 많았고, 후추는 죽은 벌레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나는 후추가 다가가 냄새를 맡도록 내버려두었다. 역시나 벌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제 돌아서겠거니, 후추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순간! 후추가 체감상 2미터쯤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머리를 있는대로 흔들며 격렬한 춤을 추었다. 으아아. 쏘였구나. 순간 목 뒤로 소름이 확 돋고, 온 몸에 땀이 솟았다. 다급히 후추를 보니 작은 벌침이 왼쪽 콧구멍 아래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빌런이 확실해진 명탐정 놀이꾼 후추는 침이 박힌 부분을 연신 핥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슬픈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박히지도 못한 죽어가는 벌의 침은 의외로 쉽게 빠졌다. 벌에 쏘인 부분에 얼음 찜질을 해주며 검색을 해보니 강아지가 벌에 쏘일 경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쇼크 위험이 있다고 했다. 후추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병원에 가야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바로 지난 후추일기의 "이것도 지나면 추억이 된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입 주변이 조금 부어서 그 뚱한 후추의 얼굴을 보며. 미안하지만 그 얼굴이 너무 웃기기도 했다. 안심한 것은 후추의 호흡도 평소와 같았고, 낮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잘 놀았기 때문이다.
아, 진짜 웃기고 다행이다.
벌에 쏘인 자국은 후추 코에 아직 남아 있다.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명탐정 후추의 어설픈 최후가 자칫 코딱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코 밑의 자국과 찰떡같이 잘 어울려서.
후추야 세상이 이렇게 무섭다. 너 명탐정 놀이 조금만 자제해. 방아깨비도 그만 괴롭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