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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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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Sep 26. 2021

돌봄의 온기

후추일기 스물여섯 번째


도무지 달라지는 게 없고 영 답답하다, 싶어도 계절은 성실하게 바뀐다. '여름의 일'이라는 제목으로 후추일기를 쓰고,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느라 (내게는 꼭두새벽과 다름 없는)이른 아침과 깊고 깊은 밤을 골라 산책하던 때가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훌쩍, 하고 후추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이 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산책에서 후추는 한참 낙엽 냄새를 맡았었지. 갓 떨어진 낙엽에서는 태어나 처음 맡는 냄새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세상과 만난 지 1년이 안 된 어린 강아지 후추. 너는 지금 매순간 가을맞이 중이구나. 늘 후추보다 한 발짝 늦는 나는 몸에서 채 여름의 열기가 떠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시간은 꾸준하고, 이제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이 새로운 온도가 후추는 낯설 것이다. 후추 덕분에 나도 이 가을을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보내고 있다. 후추의 온도가 전해오는, 살며 처음 알게 된 낯설고 다정한 다독임을 느끼면서.


내 다리에 몸을 딱 붙이고 잠을 청하는 후추 덕분에 발시림 없이 잠드는 생활도 자랑(!)이지만 그보다 기상을 알리는(일어나라, 인간...) 후추의 핥기를 얘기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 따뜻한 온도가 내 손바닥과 발바닥을 지나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는 삶이라니. 손끝과 손바닥부터 손가락 사이 사이, 팔뚝과 팔오금까지 꼼꼼하게 관리해주는 후추의 살뜰한 접촉이 고마워 나도 모르게 "아이고, 후츄, 고마워요오오-" 하면서 몸을 일으키면 후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빠르게 흔들리는 고성능 꼬리 프로펠러를 시전하며 굿모닝 인사를 건넨다. 희망에 가득찬 듯 혀를 빼고 웃는 후추를 보면 간밤이 어떠했든 즉시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가을, 안전하고 평화로운 우리의 새로운 아침 루틴이다.


후추의 온도는 그 외에도 많은 순간 존재감을 발휘한다. 신나게 놀고난 뒤 헥헥대는 후추의 입에서 나오는 따뜻한 숨의 기운, 산책 후 만져지는 후추 발바닥의 홧홧한 열기,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추의 따뜻한 몸과 그 몸이 누웠던 자리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이런 온도가 일상을 분명한 행복으로 채워주고 있다. 금세 손과 발이 시려워지고, 서늘한가 싶으면 이내 쌀쌀해지는 가을은 어쩐지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는 계절인데. 나는 앞으로 가을의 서늘함을 후추의 체온으로 아름답게 물들여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다정함, 이라는 단어에 깃든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후추의 체온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랜 기간 남편과 둘이서, 그러니까 다 큰 성인 둘이 제 앞가림을 하며 살았다. 돌봐야 할 존재는 없이, 그 조건이 주는 안정감과 독립감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낸 시간이 10년이 넘었다. 그랬는데 후추로 인해 돌봄이 가져다주는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조심스럽다. 어떤 돌봄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돌봄은 그 가치를 거의 인정 받지 못하고, 어떤 돌봄은 자의라고는 거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돌봄들에 몸서리쳤고, 그러한 돌봄의 가능성들을 최대한 차단하면서 지내왔다. 다만. 이 돌봄은 나에게 몰랐던 종류의 사랑을 일깨운 아주 새로운 것으로 다가온다. 편협한 나의 사고로는 채 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던, 돌봄이라는 행위가 갖는 엄청난 스펙트럼을 나는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자발적인)돌봄의 행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남다른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애틋한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침 루틴을 충실히 수행하고 나면 우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간다. 내가 물을 한 컵 마시는 동안 후추는 배변패드에 오줌을 싸는데 그것을 치우며 다시 한 번 후추 몸의 온도를 느낀다. 그 완벽한 몸에서 막 흘러나온 것의 온도. 누군가는 그 뜨끈한 액체의 온도에 기겁을 하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온도를 느끼는 일이 소중하기만 하다. 후추가 오늘도 건강하구나,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로운지, 언제까지고 변함없이 이 온도를 느끼며 살고 싶다... 나는 그 온도가 식어가는 동안 그런 생각에 잠긴다.

또 이런 것. 어떤 오후에 곤히 잠든 후추의 오르내리는 몸에다 조심스럽게 손을 대고 있을 때가 있다. 행여 이 애가 잠에서 깰까 천천히 손을 거두면서, 오직 바라는 것은 좋은 꿈을 꾸는 것인 그 순간에 나는 충만한 돌봄의 행복을 느낀다. 털을 빗어줄 때, 밥과 물을 담는 그릇을 깨끗이 씻어 말릴 때, 후추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잘 빨아 햇빛에 말릴 때, 아직 뜨거운 낮의 열기를 담은 후추의 까만 털을 손바닥으로 쓸고, 몸에 묻은 더러운 것을 닦아줄 때. 마음에는 후추의 체온과 꼭 같은 온기가 퍼지고, 재차 이 감각이 언제까지고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애틋하게 기도한다. 인간이란, 어째서 이런 데서 사랑을 느끼는 존재인지.


사족이지만, 나는 이것을 모성애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모성애로 말하는 것은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의 말처럼 "어머니를 모욕하고, 동물을 깎아내리고, 사랑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는 단순무식한 견해이다." 후추를 돌보는 일의 온기는 다른 존재를 돌보는 일과는 다른 온도일 것이다. 더 강렬하고 뜨거운 온도의 돌봄도 있고, 미지근한 온도의 돌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돌보는 마음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돌봄'이라는 말을 단순하게만 이해했던 나로서는 이 깨달음이 놀랍기만 하다.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돌봄의 온기가 내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데운 것과 같이 더 많은 사람들이 돌봄의 온기를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하고. 세상에는 돌봄을 기다리는 존재들이 너무 많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돌봄을 다양하게 주고 받으며 그렇게 삶이라는 것을 다채롭게 만들어보기를, 한 번 그래보자고 곁에 있는 이에게 말해보고 싶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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