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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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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Feb 20. 2022

1등 아니어도

후추일기 서른세 번째

(*서른한 번째 후추일기 '그 자체로 완벽'에 이은 글입니다)


올림픽에는 어찌나 신기한 힘이 있는지. 시작하기 전까지는 '음.. 별로 관심 없어' 상태였던 것이 분명한데도 일단 시작을 해버리면 '오오오! 재밌어! 멋있어!!' 상태가 되고 만다. 어쩜 번번이 그런지 모르겠다. 지난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여자 배구에 열광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 또 쇼트트랙과 컬링이다. 올림픽이 '축제'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얼룩진 뉴스들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진정한 축제로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 앞에 놓인 것을 대하는 성실한 태도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첫 번째 장면은 여자 1000m에서 은메달을 따고 눈물 흘리는 최민정 선수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무심코 '아이고, 금메달 아니라 속상한가보다'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 생각을 한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이 생각 안에 얼마나 무서운 무한경쟁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지 곧장 깨달았기 때문이다. 1등이 아니면 다 슬픈가? 그렇지 않잖아. 메달의 색깔보다, 메달 수상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의 내용이고, 그 경기에 이르기까지의 노력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생각했)으면서 최민정 선수의 눈물을 어떻게 아쉬움의 눈물로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나를 비웃듯 최민정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힘들게 준비하는 동안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에 메달을 땄다”(기사 보기)


그러니까 열심히 준비했고, 결과에 기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선수의 말을 듣자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내 얼굴이 빨개졌다.(어떤 생각들은 고개를 내밀 때마다 의식적으로 잘라내야 하는 법이다. 생각의 관성이라는 것이 늘 무섭다.) 더구나 그동안의 운동 경기에서 내가 정말 좋아해온 장면들은 하나같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결과와 무관하게 만족하는 선수들의 얼굴이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 여자 배영 100m 준결승에서 3위로 들어온 중국 푸위안후이 선수의 인터뷰(기사 보기)를 자주 생각한다. 자신이 3위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감격하던 선수는 2위와 0.01초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니요, 절대요! 제 손이 더 짧았나보죠"라면서 그저 행복하게 웃었다. 자신의 성취를 만끽했다. 그의 인터뷰를 처음 봤을 때 내 눈에는 그 선수가 정말이지 천사처럼 느껴졌다. 저 사람은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러 우리 곁에 온 천사다. 나는 그의 기쁨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나의 기준에 두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 그것에 진정으로 집중했을 때 얻게 되는 순수한 행복을 그 선수 덕분에 실감하게 되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의 우상혁 선수는 어떤가. 높이뛰기 경기에서 그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도전이 성공할 때는 (무대 위라도 개의치 않고)마음껏 자축하고, 주변의 응원에 한껏 기대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기뻐했다. 세상에, 경기 중에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나는 정말 놀랐다. 그리고 그의 이 말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저는 행복합니다. 오늘 메달은 비록 못 땄지만 괜찮습니다"(인터뷰 영상 보기)


평소 내가 후추한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대단해!"다. 밥을 잘 먹었을 때, 내가 던져준 양말을 잘 물고 왔을 때, 노즈워크 장난감을 잘 갖고 놀 때, 산책을 다녀왔을 때, 심지어는 똥을 잘 쌌을 때와 잘 자고 일어난 아침에도 나는 후추에게 "대단해"라고 말한다. 그건 응원의 말이 아니다. 진심이 꽉꽉 들어차 터져나오는 말에 가깝다. 후추는 내게 존재 자체가 경이고, 후추의 매 순간이 내게는 대단함이기 때문에.

그런데 나는 나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조금 더 했어야 한다고 꾸짖고, 결국 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타인과 비교해서 위축시킨다. 언젠가 "나를 내가 좋아하는 친구 대하듯 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만 역시 생각의 관성이라는 것은 무섭게 힘이 세서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내 의지에 반하는 흐름을 보이고 만다. 그래서 이 장면, 남자 쇼트트랙 15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따고 아쉬워 하는 선수들과 4강 진출이 무산된 컬링의 팀 킴 선수들을 보았을 때 마음이 요동쳤다. 자꾸 '아니야, 그러지 마, 너무 잘했어 선수들!' 하는 마음이 됐다. 처음에 그 마음은 후추를 보며 늘 대단하다고 느끼는 감정과 같은 곳에서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이어 번번이 나를 꾸짖는 마음 쪽에 머물렀다.

열심히 한 사람들, 성실한 사람들, 조금 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그런 집념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숙명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결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를 알리고 싶은 공명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결과 하나가 자신의 그 모든 진실의 마음과 노력한 시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했다는 사실, 애를 썼다는 사실, 적어도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나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최근에는 이런 문장을 읽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이란 얼마나 실감 나는 꿈인지. 어떤 의미에서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이미 마음에서 일어난 일. 명명백백한 마음. 다른 누가 아닌 자신에 의해 쓰인 사실. 그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이현, 『호수의 일』, 296쪽)


그래서 나는 우리가 더 자주 나 자신을, 나의 일을, 나의 지금을 "대단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자신만의 도전과 모험을 해나가는 모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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