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소리에 대하여

별별 사람들 12화. 한국은 싫지만 돈은 벌고 싶은 개똥철학

by 매콤한 사탕

Y가 베스트셀러 메인 부스에서 얇은 철학책을 집어 들더니 물었다.

< 개소리에 대하여 >

"이 책 읽어봤어?"

"글쎄. 익숙하면서 생소한 것이 책표지만 봤던 거 같은데."

"솔직하네. 합격!"

"뭐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는 자기가 좋다고"


Y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 이거 살까 하는데. 혹시 이 책 < 개소리에 대한> 개소리면 어쩌지?"

"뭔 개소리?"

실은 나 개소리 트라우마 있거든


몇 년 전 Y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베스트셀러 부스에서 아주 얇은 철학책 한 권을 골랐다.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표지의 그 책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 이후 현대사회를 적확히 분석했다고 유럽에서 극찬한 책이라더라고."


국뽕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뉴스였지만, Y는 국뽕에 취해 얼른 그 책을 샀다. Y는 덧붙였다.


국뽕이면 어때?
사실적으로다가
난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러운데!


지적허영이 극에 달하던 시절 Y는 겉멋에 철학과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그때 배운 철학자들의 명저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난해한 비유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일부러 어렵게 쓴 게 아닌가 싶더라고. 철학과 애들도 해석강의를 따로 들어야 한다니까 말 다했지 뭐야. 꿈보다 해몽인 거야. 하긴, 책이란 게 두꺼울수록 폼나니까 꽤 잘 팔렸을 거야.

암튼 그 철학책은 달랐어. 쉽더라고. 막힘없이 술술 읽혀. 유럽사람들이 왜 극찬했는지 알겠더라"


Y는 두 시간 만에 책을 독파했다. 어느 정도 공감했고, 읽는 사람에 따라 큰 위안을 받을 만하다고 느꼈다.

다만, 그 책에서 말하듯이 만성피로를 해결하기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쯤 Y는 "박카스"를 마시고 싶었다. 현대사회의 피로를 말끔히 해소해 줄 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박카스"는 꿀맛이니까.


"얼마 뒤 서점 VIP회원 작가강연회에 초청받았어."


Y는 짜증이 난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강연시간이 한참 지나도 철학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 어떤 사내가 문을 세게 걷어차며 강연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승려복인지 무도복인지 모를 칙칙한 회색 개량한복에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 사내는 강단을 그대로 지나쳐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뚱땅뚱땅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연주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소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참 동안 소음을 듣고 있자니 Y는 머리가 멍해졌다. 필름이 뚝 끊기듯 급하게 피아노가 멈췄다. 사내가 피아노를 등지고 앉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강단에 섰다.


"오늘 내가 여기 안 오려고 했는데. 이 출판사 작자들이 내 의사를 무시하고. 한국 출판사 중에 탑이라더니 수준이 영~ 뭐 한국이 뭐 그렇지. 아무튼 내가 왜 나왔냐?"


사내는 무대에서 날다람쥐처럼 뛰어내려 맨 앞줄에 앉은 청중의 책을 낚아채 힘껏 높이 쳐들었다.


"이게 내 책인데 출판사에서 많이 팔아줬지. 그래서 내가 한국에 온 거야.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뭘 안다고... 이런 건 한 마디로 쓰레기야!"


사내는 모르는 사람 소유의 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곳이 작가 강연장인가, 연극 공연장인가 헷갈리던 Y는 그제야 저 미치광이가 그 철학자구나! 깨달았다.


"돈만 밝히는 작자들이 이런 졸작을 판다고. 내가 쓴 책 중에 이 책 말고 대대로 가보로 삼을 만한 책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내 초기작인데. 쓰레기 같은 놈들이 그런 가치를 알겠습니까? 그러니 한심한 노릇이지."


그 미치광이인지 철학자인지 모를 사내가 다시 피아노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그만해요! 그만해! 난 여기 강의를 들으러 왔지. 한심한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화가 난 청중이 소리치자 사내는 피아노를 멈추고 관계자에게 말했다.


"여기 천 원만 줘봐."


관계자가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주자 사내는 그 청중에게 천 원을 내밀며 경멸하듯 말했다.


"가지고 어서 꺼져."

사람들이 하나둘 강연장에서 탈출했다. 미치광이인지 철학자인지는 모를 사내놈은 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칠 듯이 노려보다가 다시 피아노를 사정없이 구타했다.


Y는 책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위화감의 정체와 마주했다.

약쟁이인가?
철학자인가?
아니면,
한국은 싫지만
책은 팔고 싶은 재외국민인가?


"내가 이 나라 살 땐 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서양 놈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주 사람 귀찮게 하더라고. 이거 내가 하룻밤 사이에 대충 쓴 거야.

이런 건 20년도 안 돼서 아무도 기억 못 할 졸작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극찬하는 서양 놈들이나 서양 놈들이 좋다니까 물불 안 가리는 니 놈들이나.

내 책 사고 싶으면 내가 진짜 정성껏 쓴 책들도 출판해줘야 할 거 아냐!"


다음날, 그 강연장의 일은 기사화됐다.


"그럼 뭐 해. 요새 같으면 유튜브에 갑질하는 모습 도배되고 한국에 다신 발도 못 디뎠을 작자가 시절을 잘 만나서 신작이 또 나왔네. 이렇게 잊힐 권리가 있다니 참 운이 억수로 좋아!"


Y는 화제의 신작 코너에 있는 책을 가볍게 팔꿈치로 내리찍으며 말했다.

나는 Y의 손에 들린 <개소리에 대하여>를 가리키며 물었다.


"살 거야? 또 개소리 트라우마 생기면 어떡해?"

"아닐 수도 있지. 이 시대에 진정한 철학자의 명저일 수도 있잖아. 그거 알아? 지적 허영은 죽어야 끝나."


Y는 귀엽게 혀를 쏙 내밀고 돌아서 명랑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Y의 개소리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부디, 운이 억수로 좋은 그 식자가 쓴소리를 듣는 날이 어서 오길!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1화불행을 만드는 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