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사람들 17화
T에게는 남다는 룰이 있었다.
'비혼의 시대'의 결혼의 행복,
'저출산의 시대'의 자식의 행복,
배우자나 자식 자랑할 땐 절대 맨 입으로 하지 않기!
T는 화려한 여름 한정 신상 음료 두 잔과 예술작품처럼 완벽한 케이크 두 조각을 가지고 왔다.
"우와~"
나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얼마 만에 먹는 달달구리인가!
저속노화고 뭐고 간에 결국, 나에게 필요한 건 순수한 정제당이었다!
나는 망고음료를 쭉 들이키고, 완벽한 케이크를 주저 없이 포크로 쪼개어 입안에 가득 넣었다.
"행복해?"
T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이 행복은 PT선생님에겐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당 떨어지기 전에 털어놔. 어떤 자랑이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유치원 공개수업 날이었다.
T는 반차를 쓰고 서둘러 유치원으로 갔다.
늦어서 수업을 반 이상 놓쳤지만, 딸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팔짝팔짝 뛰며 환하게 웃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같은 반 엄마들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하윤이 엄마, 오늘은 오셨네요.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실래요?"
카페를 향해 걸어가면서 T는 필요이상으로 긴장을 했다. 직장 다니는 엄마는 잘 안 끼워준다는 말을 커뮤니티에서 종종 봐온 터였다. 같은 반 엄마들은 서로 잘 아는 것 같았다. T는 엄마들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하지 말아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T는 침착하게 되뇌었지만 혹여 자기 때문에 딸아이가 소외될까 봐 두려웠다. 그때, 한 엄마가 다가왔다.
"은우엄마예요. 제가 그 반지 주인이랍니다."
"네?"
"어머, 하윤이한테 못 들으셨어요?"
어느새, T와 은우엄마를 둘러싼 엄마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이고, 우리 은우 어떡해."
"이래서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거야."
"하윤이는 잘못 없지 뭐."
"은우엄마만 불쌍하지."
다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그 이야기를 했다.
은우엄마는 남편이 생일선물로 준 사파이어 반지가 사라진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분명 화장대에 두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반지는 없었다. 설마, 키우는 고양이가 가져갔나? 은우엄마는 뒤꿈치를 들고 높다란 캣타워 위를 샅샅이 뒤졌다. 없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발 없는 반지가 어디 갔을까? 혹시 밖에서 떨어뜨린 건가? 귀걸이도 아니고 반지가 손가락에서 떨어졌다고? 말이 돼? 은우엄마는 부질없이 중얼거리며 보석함에 반지를 넣지 않은 자신을 후회했다. 그러다가 유치원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은우가 하윤이한테 반지를 줬는데,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은우는 엄마반지를 T의 딸에게 프러포즈 선물로 줬다고 했다. 고작 5살 아들을 벌써부터 빼앗긴 것 같아 은우엄마는 속이 상했다.
"아들, 왜 엄마반지를 하윤이를 갖다 줘?"
"엄만, 아빠한테 또 사달라면 되잖아요."
"뭐? 너 엄마보다 걔가 더 좋아?"
"네, 나중에 크면 하윤이랑 결혼할 거예요."
"왜? 걔가 뭐가 그렇게 좋은데?"
은우는 착하고 상냥한 하윤이가 좋다고 했다.
혼자 있을 때 함께 놀자고 먼저 말해줘서 좋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장난감을 빼앗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눈물 나게 가기 싫던 유치원을 매일매일 가고 싶게 만들어준 하윤이가 좋다고.
T의 손을 꼭 잡은 은우엄마가 말했다.
"은우가 그러는데요. 하윤이는 동화 속 착한 요정 같대요."
T는 자기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행복해?"
"그럼, 내 딸 덕분에 동화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