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사람들 16화
참 이상한 일이다.
척척박사 J의 집에서는 누구나 체면치레하지 않고 마음에 콕 박힌 말들을 공개적으로 술술 꺼낸다.
술이 맛있게 술술 들어가서 그런 걸까?
척척박사 J의 집에는 다양한 술들이 구비되어 있다.
우리는 맥주든, 소주든, 소맥이든, 와인이든, 진이든, 끌리는 술을 골라 취향껏 마실 수 있었다.
다양한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척척박사의 아내이자 내 동기가
노가리구이부터 와인삼겹살에 조개탕까지 다양한 술에 맞는 안주를 척척 내놓았다.
여기가 천국인가? '나의 아저씨'의 동네술집이 부럽지 않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그 말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4살 딸아이를 둔 초보부모가 싸움 아닌 싸움 같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제나처럼 척척박사 J는 조언하는 법이 없이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생 딸을 둔 H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애한테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날은 휴일이었지만 H는 출근하는 날이었다.
H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하루 종일 고생한 남편을 배려해 집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 식당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키즈카페가 있어서 부모, 아이 모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키즈카페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H는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남편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
"다행히 잘 지냈나 보네. 힘들지 않았어?"
"힘들 게 뭐 있어? 이제 다 켰는데."
"아직 4살인데. 챙겨줘야지."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자기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 내가 이상해?"
"자기가 애들 때문에 힘들어하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애들 스스로 할 나이가 됐지 뭐. 오늘 보니까 엄마는 하지 말라는 것만 많다고 불만이 많던데?"
"뭐? 배신자들이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놔줘. 자기도 맘 편히 살아."
"그래. 엄마 없이 알아서 하면 나야 좋지 뭐."
그녀는 남편의 말을 듣고 한결 홀가분해졌다. 아이들 없이 편안히 맛있게 밥을 먹었고, 남편은 스마트폰을 했다.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할 무렵 H는 키즈카페로 가서 아이들을 찾았다. 곧 식당 문 닫을 시간이었다. 6살 첫째가 신나게 미끄럼틀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미끄럼틀 거꾸로 타면 안 돼! 다쳐! 너도 친구들도 다 위험해져!"
H는 첫째를 막아서며 말했다. 첫째는 감시자 엄마가 등장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동생은 어디 있어?"
"몰라요. 여기 어디 있을 텐데."
H는 아빠에게 첫째를 돌려보내고 둘째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식당직원에게 물어보고, 손님에게 물어보고, 안내방송을 하고, H가 식당을 샅샅이 살피는 동안 남편은 밖으로 나가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았다. 식당 마감시간까지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은 경찰에 신고하고 CCTV를 돌려보자고 했다. 일단은 집에 가자고.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H는 식당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유괴된 건 아닐까 혼자 길거리에 나가 사고라도 당한 거 아닐까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엄마의 촉이었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식당을 샅샅이 살피는 동안 그녀가 빼먹는 유일한 장소.
H는 만류하는 남편을 뿌리치고 그곳으로 달렸다.
남자화장실 문을 열자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은 채였다.
H는 울면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4살 여자아이는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을 구별할 수 없었다. 화장실 표시판은 작은 키가 볼 수 없는 위치였고 글자를 알지 못했다. 그냥 아빠가 이제 화장실엔 혼자 가야 한다고 해서 스스로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좌변기 칸에 앉아 집에서처럼 문을 닫지 않고 대변을 보았다. 그리고 닦아달라고 엄마, 아빠를 크게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너무나 끔찍했고 무서운 일이었다. 뒤따라 온 남편의 얼굴에서 H는 자신이 느낀 충격과 공포를 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남편에게 이래도 내가 예민한 거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남편이 와서 좋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H는 남편과 함께 사랑하는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그저 다행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너무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고, 방심할 수는 없는 일도 있고, 부모가 되는 일은 정답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 같아요."
H의 이야기에 척척박사 J의 집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누구도 섣불리 답을 단정 짓지 않는 장소.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신기하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곳.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앤딩이라 그저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