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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방

별별 사람들 15화

by 매콤한 사탕

"어차피 이사 갈 건데 페인트까지 칠해야 돼?"

"월세라도 칠할 건데?"


Y는 전셋집 벽에 대고 능숙하게 페인트롤러를 굴렸다. 순식간에 벽 한 면이 산뜻한 무결점의 순백색으로 바뀌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우와, 누가보면 업체 부른 줄! 집주인이 좋아하겠다."

"집주인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그야 그렇지만"

"몰라서 그러는데 복구해 달라는 집주인이 더 많아. 그럴 땐 간단히 떼어낼 수 있어."

"떼어내?"

"응, 이거 포스트잇처럼 붙였다 떼어낼 수 있는 페인트거든."

"우와, 세상 진짜 좋아졌다."

"그럼~ 좀 비싸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못할 게 뭐냐?"

"아깝지 않아?"

전혀,
난 하루를 살아도
집다운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의거든.


Y는 50년도 더 된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따로 방을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까짓 껏 파견근무 2년을 못 버틸까 싶었지."



여름 내내 오뉴월에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지독한 비염이었다.


"될 수 있으면 에어컨을 끄고 생활하세요."


의사는 냉방병이라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Y는 발작적으로 재채기를 내뱉으며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쾌한 곰팡내가 재채기에 섞여 들어왔다. 구토가 밀려오나 싶더니 때마침 목에 걸려 있던 가래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속이 후련했다. 일순간 식은땀이 시스템 에어컨의 청량한 냉기처럼 느껴졌다.


Y는 입안에 가래를 뱉어내려고 휴지를 찾았다. 아까 쓴 휴지 뭉치가 손끝에 닿았다. 더럽고 찝찝한 그 감촉에 진저리가 났다. 캄캄한 방바닥을 더듬을 용기가 싹 달아났다. Y는 도리없이 일어나 천장에 달린 형광등 줄을 잡아당겼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방이 흉물스러운 제 모습을 찾았다. 초여름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검은곰팡이가 아열대성 스콜과 만나 어느새 온 집을 삼켜버릴 기세로 무섭게 번져나갔다. 벽과 맞닿아 있는 오래된 나무 책상이 삭기 시작하면서 이상 야릇한 냄새를 풍겼다. 독버섯이라도 자랄 기세였다.


Y는 심란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썩은 나무 책상, 할인매장에서 산 싸구려 철제 의자, 옷장 겸 빨래건조대로 쓰는 이동식 행거, 쓰레기통 등을 방 한가운데 옹기종기 끌어다 놓았다. 곰팡이가 번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 방에는 에어컨과 냉장고는 없었다. 전자제품이라고는 노트북과 스마트폰 그리고 소형 선풍기가 전부였다. 어차피 잠만 잘 건데 버티면 그만이라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뭣도 모르면서 생떼를 부렸던 것이다.


Y는 사방에 퍼진 시커먼 곰팡이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재빨리 수그렸다. 바닥에는 꽃무늬 요와 이불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불에 털썩 주저앉아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가래를 뱉고는 여기저기 흩어진 휴지 뭉치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손바닥만 한 새까만 동그라미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믿을 수 없지만,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묘한 일이었다. 동그란 구멍은 마치 과녁처럼 중심부로 갈수록 더 짙었다. 새까만 동그라미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규칙하게 꿈틀거렸다. Y는 구멍을 만져보려다가 손을 얼른 거두었다. 충격과 공포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검은색 원이 움직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싱크홀이었어?"

"아니."

"그럼 그 구멍은 뭐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묘한 구멍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나 한 번쯤 마당에서 목격했을 만한 지극히 흔한 일상이었다.


"맹세코 난 그 방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잠만 잤거든. 먹을 거라곤 하나도 없었어. 생수밖에. 그런데..."

Y는 그것을 알아보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손바닥만 한 새까만 동그라미의 정체는 개미 떼였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수의 개미 군집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게걸스레 먹고 있는 먹이는 바로, Y가 휴지에 뱉어놓은 가래였다.


"벌레들이란 벌레들은 모두 다 모여드는 방이었어. 개미, 바퀴벌레, 지네... 그 방의 주인이 나인지 벌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지. 겨울에는 추워서 죽을 것 같더니 여름에는 곰팡이에 벌레에 매일 밤이 지옥이었어. 비염에, 피부병에, 식욕도 수면욕도 다 잃었지. 천장에서 떨어진 벌레가 입속에 들어갈까 봐 이불은 머리까지 덮어쓰고 잤어. 벽지 속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아."


Y는 하루를 살아도 집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주의라고 했다.

안전하고,

쾌적하고,

언제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집.

다시 일어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집.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벌레의 방에서 벗어나
집다운 집에서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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