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사람들 14화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야? 어디 x 같은 소릴하고 앉아있어!"
A가 마음껏 분통을 터뜨렸다. 다행히 미용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올 초에 A는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미용실을 물려받아 1인 미용실로 개조했다.
100% 예약제로 운영하고 한 타임당 손님은 딱 한 명만 받는 시스템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단골 고객이 많았던 터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아휴, 우리야 너무 감사하지. 연예인들이 오는 미용실에서 일했었다며? 아휴, 내가 볼 때는 엄마보다 기술이 좋아. 거기다 아휴, 역시 젊은 사람이라서 달라. 센스가 있어. 여기 봐봐! 기다릴 필요 없지, 북적이지 않아서 쾌적하지, 꼼꼼하게 나한테만 신경 잘 써주지, 싹싹하지, 아휴, 엄마가 얼마나 좋으실까. 아들 하나 기똥차게 키웠네"
고객들은 돌아가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A를 칭찬했다.
칭찬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A는 내가 유일하게 머리를 맡길 수 있는 실력 있는 헤어디자이너이다.
아무리 악성 곱슬머리라도 A 앞에서는 얌전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A가 오래오래 헤어디자이너로 살게 해주세요. 제발.
"진짜 기분 x 같아서 확 관둘까?"
나는 겁이 덜컥 나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안돼! 너 같은 인재가 그만두면 전인류적인 손해야!"
"전인류까지?"
"당연하지. 제발 나한테 얘기하고 싹 풀어버려."
A는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귀부인 같았다.
단아한 옷매무새는 고급스러웠고
조선시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머리숱이 풍성하고 피부가 매끄러웠다.
아주 곱디고운 귀부인.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굵은 웨이브펌으로 부탁드려요."
귀부인의 말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그야말로 '빠글빠글 파마'가 아닌 '웨이브펌' 같았다.
A는 조용히 감탄했다.
이렇게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당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공손하게 존댓말을 쓸 수 있다니
참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귀부인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A의 감탄에 귀부인은 경박스럽게 우쭐대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아직도 부족하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배운 사람답게 귀부인은 시술이 끝난 다음 예쁘게 머리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깊이 숙여 A에게 인사를 했다.
귀부인을 다시 만난 건 새로 생긴 주상복합 아파트의 어느 매장에서였다.
A는 일행과 함께 물건을 고르는 귀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교양이 넘치는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일행은 귀부인의 따님 같아 보였다. 그녀 또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자태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A는 귀를 의심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 머리 했네?"
"1004호 할머니 말만 듣고 청담동에서 온 미용사라고 해서 갔는데 별로더라고."
"머리 괜찮은데 왜?"
"좀 싸구려같아 보이지 않니? 괜히 이 근처에서 했나 봐."
"그러니까, 엄마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지!"
"아휴, 그래도 사람은 좋더라. 아니, 엄마라는 사람이 멀쩡한 애를 왜 굳이 미용을 시킬까?"
"왜?"
"아유 솔직히 좀 그렇잖아. 옛날 같으면... 천한 일인데. 생각이 없는 거 아니니."
"xx하고 자빠졌네! 그걸 말이라고 해? 생각이 없는 게 누군데!"
이야기를 듣던 나는 A보다 더 버럭하고 말았다.
"어디 감히 내 최애 헤어디자이너님의 심기를 건드려!"
내가 길길이 날뛰는 동안
A는 피식거리며 나의 악성 곱슬머리를 얌전히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