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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글아 로 Mar 03. 2021

일 년 미리 쓰는 미래 일력 -취미 스위치 켜기

2022년 2월 4일 금요일

커피가 나에게 주는 것.


일 년 미리 쓰는 미래 일력

- 취미 스위치 켜기


취미 부자인 사람들이 부럽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게 부럽고, 그걸 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가 부럽고, 그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부럽다.

사실 나도 시간과 공간과 체력이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산책, 수영, 동네서점 가기, 도서관 가기, 만화책 읽기. 반신욕.

생각만 해도 좋지만 생각하는 시간 조차 죄책감이 남을 정도로 여유 없는 삶을 살다 보니, 취미는 딴 세상 얘기 같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취미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같이 여유 없는 사람도 취미를 가질 수 있다. 그건 팟캐스트 듣기, 커피 내리기 같이 일과 동시에 할 수 있는 것들이다.


1.

팟캐스트는 내가 조용히 하는 일을 할 때 배경음악처럼 내 곁에 틀어둔다. 빨래 널기, 콩나물 다듬기 같은 단순한 집안일을 하거나 반복적인 컴퓨터 작업을 할 때  팟캐스트를 틀면 마치 내 몸을 환하게 해주는 스위치를 켜는 것 같다. 내 귀에 익숙한 팟캐스트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일을 하면서도 ‘내 시간이 왔구나.’ 싶다. 내용은 흘러가 버릴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머리에 꽂힐 때도 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내것이 된다.


2.

커피 내리는 것은 나에게는 일 중에 하나기도 하다. 커피를 너무 좋아하는데 에스프레소로 뽑는 커피나 인스턴트커피는 카페인이 강해 많이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카페인이 적은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는데 이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원두도 갈아야 하고, 필터도 끼워야 하고, 온도도 재야 하고, 잔도 데워야 하고, 뜸도 들여야 하고, 천천히 물줄기를 내려야 한다. 인스턴트커피는 하나 넣고 뜨거운 물 부으면 끝인데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도 나는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리면 시간이 멈춘다. 이상하게 주변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 것 같다.

커피를 갈면 그 향이 온 방에 퍼진다. 그 향을 맡으며 원두가루를 붓으로 쓸어내리고, 온도가 잘 맞는 물을 살짝 부어 원두가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을 만끽한다. 그 때 커피 향이 더 진하게 퍼진다. 그렇게 1분 남짓 기다려 주전자를 돌려 가며 커피를 내린다. 거품이 터지듯 원두가 뽀글거린다. 그리고 졸졸졸 커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것만 한다. 이 시간이 나를 멈추게 해 준다.


좋기도 하지만 매일 이렇게까지 해서 커피를 마셔야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커피잔 쪽으로 손을 뻗는다. 커피는 마셔야 하니까.

커피를 마시면 나에게 이런 것들이 생긴다. 날카로운 시선, 상기된 볼, 꽉 다문 입.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일을 한다. 세가지를 간직한 얼굴의 내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술술 쓰고 그림을 쭉쭉 그린다.


이렇게 커피 내리는 것은 나에게 일 같은 취미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취미 스위치를 켜면 나는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세상의 부품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로 존재하는 시간 말이다.

그래서 취미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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