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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02. 2024

누군가는 필요로 하는 재능이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4)

“정말? 근데 왜 안 꺼내놨어?”

“엄마가 만든 건 이렇게 예쁘지 않거든.”

“에이, 아냐. 그래도 꺼내놓자, 엄마.”

“그래, 그럴까 봐.”


10대 소녀의 얼굴이 느닷없이 진중해졌다. 심각하게 입술을 문 채 빨대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꼭꼭 눌러 접던 나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엄마, 회사 복직할 거야?”


아직 다 식지 않은 커피를 입에 머금었던 김은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유예해 버린 결정의 순간을 결코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 딸이 다시 한번 상기시킬 줄은 몰랐다. 엄마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던 나예가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술을 떼었다.


“엄마가 하고 싶은 거 하면 좋겠어.”

“돈 벌어야지, 엄마는. 아빠 혼자 고생시키면 안 되잖아.”

“엄마는 뭐 고생 안 해? 밖에서 돈 버는 것만 고생이야? 엄마는 집에서도 일하잖아. 밥하고 청소하고 그건 일 아니야?”


갑자기 격해진 나예의 목소리에 놀란 건 김은지뿐만이 아니었다. 일층 좌석에 앉아있던 이들이 잠시지만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김은지로서는 충분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나예를 다독였다.


“엄마 좀 감격했다, 얘. 생각해 줘서 고마워.”

“아니 진짜, 난 심각하게 한 얘기거든? 아까 병원 선생님도 그랬잖아?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일을 찾아가게 돼 있다고.”


조금 다른 말 같은데, 라고 김은지는 생각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고 나예의 말을 경청했다.


“응, 그랬지.”

“그러니까. 나도 잘 몰라, 모르는데… 그래도 엄마가 그 일은 좀 그만두면 좋겠어. 엄마 아침마다 죽으러 가는 사형수 같아. 알아?”


김은지는 생경한 기분으로 제 앞에 앉아 열변을 토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게 묶였다고 징징거리던 게 언제였다고 이렇게 제법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나, 그게 솔직한 심경이었지만 제 나름대로 엄마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는 것이 고맙고 대견했다. 나예는 엄마가 그리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쿠키를 부숴서 제 입에 밀어 넣으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엄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달달하고 예쁜 거. 그래!”


갑자기 뭐가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나예가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신나게 말했다.


“엄마, 우리 같이 집에서 쿠키 구울까?”

“얘는, 갑자기?”

“아니 진짜. 요즘 홈베이킹 독학하는 거 별일도 아니야. 내 친구들 중에서도 잘하는 애들 많거든? 다 영상 보거나 책 보고 배워서 하는데 할 만 하대.”

“그렇구나.”


큰 감흥 없이 심상하게 대꾸하는 엄마를 보고 뾰로통해졌던 나예는 다시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나야 잘 모르지만, 엄마. 일이라는 게,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를 해결해 주는 거 있잖아. 그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응?”


엉뚱한 말에 김은지의 주의가 다시 딸에게 쏠렸다. 이번에는 빨대를 들어 올려 잇새로 질근질근 씹던 나예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냥 학교에서 재미도 없는 경제 얘기 배우다가 아까 병원 선생님 얘기도 듣고 지금 여기 카페도 와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실 이거 내 친구 얘긴데, 걔네 집에는 비밀이랬거든…”


김은지는 말꼬리를 늘이는 나예를 보며 어쩌면 이것은 딸이 지금껏 밝히지 않았던 사생활을 일부 털어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자세를 바로 했다. 엄마의 비장한 각오야 어쨌거나 말거나 나예가 말을 이어갔다.


“친구가 일러스트 알바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가끔 받거든, 에스엔에스에서. 뭐라더라, 커미션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부르던데. 학생이고 그러니까 뭐 엄청 금액이 크고 그러진 않는데 그렇게 의뢰받은 그림을 그려주면 받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대.”

“그래?”


도대체 고등학생한테 돈을 쥐어주며 그림 의뢰를 하는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데, 하고 캐묻고 싶은 게 김은지의 솔직한 속내였으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나예가 입을 꾹 닫아버릴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녀는 가만히 경청했다.


“응. 돈 받고 하는 일인데도 너무 고마워하고 그런다는 거야. 맘 같아선 엄청 인기 있고 실력 쟁쟁한 일러스트레이터한테 맡기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은 비용이 비싸기도 하고, 우리 같은 일반인들 의뢰는 안 받기도 하고 그렇거든.”

“그렇구나.”

“그게 뭐건 간에 그걸 꼭 필요로 하던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가진 능력껏 해결해 줄 수 있는 거 되게 좋은 것 같아.”

“하지만 나예야, 그런 일은 고정적인 수입 보장이 되진 않잖아. 생활이 너무 불안하지 않을까?”

“알아, 나도. 내 말은 그냥 그게 되게 낭만적이기만 한 소리인 건 아는데 난 그냥 그게 너무 좋다고. 엄마는 지금껏 그렇지 않게 일했으니까 그런 이상적인 일로 인생 2막 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어서,”


고개를 푹 숙인 나예가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말을 맺었다.


“아빠는 절대 엄마한테 이런 말 안 해줄 거 내가 아니까. 나라도 해주고 싶어서.”


찰나 김은지의 목이 메었다. 내도록 철부지인 줄만 알았던 나예가 이렇게 엄마에게 세심히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유리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나예의 손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니 고개를 든 딸의 눈가가 조금 붉어서 김은지는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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