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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30. 2024

그 사람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3)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다른 분들도요. 저 할머니 괜찮아지시면 꼭 수업 다시 나갈게요.”


불안이 가신 목소리였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는 확신이 어린 음성. 듣고 있는 사람의 불안마저 일부 걷어가는 그 확신을 어디에서 얻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 모두를 안심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병원 안은 한산했다. 접수를 해 두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김은지는 딸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예는 숫제 이동장 안에 들어갈 기세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 마치 제 단짝 친구에게 수다 떨 듯 한참을 재잘댔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고양이를 식구로 받아들이길 잘한 건가, 하는 생각도 자연스레 들었다.


김은지는 어쩌다 보니 그랬다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살았던 제 집인 양 한자리를 차지했고 스스로도 그걸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았다. 김은지는 자신은 늘 그 어쩌다 보니, 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였다.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 ‘당당하게’ 뭔가를 주장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한 번 마음이 어느 모서리에 걸려버린 이후로는 매사 같은 것에 찔린 듯 따가웠다. 나예가 고양이에게 들러붙어 있는 동안 산만해진 마음을 털어내려 벽에 옹기종기 붙어 있던 액자를 바라보던 김은지는 고개를 갸웃하고 일어서서 액자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무엇에 호기심을 느꼈는지를 알아챈 듯, 데스크의 강경희가 웃음 섞인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경력이 좀 특이하죠?”

“앗, 아뇨,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데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맞았다. 하지만 속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은 싫었다. 강경희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시군요, 하고 대꾸하더니 가볍게 말했다.


“생명과학과 졸업, 10년 뒤 수의학과 졸업. 사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죠.”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던 김은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강경희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스몄다.


“반대…안 하셨나 봐요.”


저도 모르게 질문 아닌 질문을 뱉어놓고 김은지는 잠깐 후회했다. 하나마나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강경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대를…할 수가 없었죠. 워낙 하고 싶어 하던 일인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적성을 찾고 싶어 하는 대책 없는 남편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던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않아서 김은지는 조금 더 묻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던 김은지를 의식한 것처럼 나예가 슬그머니 발등을 꾸욱 밟았다. 주책맞게 남의 사적인 얘기 캐묻지 말라는 건가. 입을 다물어버린 김은지 대신 강경희가 가볍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고생은 좀 했지만 본인이 즐겁고 행복해하는 게 보이니 저도 뭐…좋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듯 한 말이 분명했으나 김은지는 찰나 마음이 덜컹거리는 기분을 맛봤다. 누군가가, 거기 있는 줄도 모르게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마음을 거세게 두드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것 같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남아 번졌다.


“엄마, 엄마!”

“아.”


눈앞을 열심히 휘저으며 엄마를 부르던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린 김은지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걱정스러운 낯으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엄마를 간신히 깨워낸 나예가 빨대를 쪽 빨아올리며 만족스레 웃었다.


 “다 식겠어, 얼른 마셔.”

“따님 말이 맞아요, 김은지 선생님.”


목쟁반에서 접시를 들어 테이블로 옮기던 이로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로미가 내려놓은 접시를 어리둥절하게 보던 김은지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자 이미 다 안다는 것처럼 이로미가 쉿,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와, 엄마. 서비슨가 봐!”


나예도 덩달아 들떠서 속닥였다. 김은지도 그러게, 미안해서 어쩐다니, 맞장구를 치려다 말고 빤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나예가 사진을 찍는답시고 호들갑을 떨었다. 얼굴 반만 한 크기의 넓적한 쿠키도 놀랍긴 했지만 그녀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그것이 담겨 있던 오목한 접시였다. 눈에 익은 접시. 공방에서 한참 제작중일 때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제 쓰임새를 찾아 앉은 모습은 더더욱 잘 어울렸다. 자신이 만들어 놓고도 꺼내놓기가 민망해서 구석에 감춰둔 첫 작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못나고 부끄러워도 이렇게 제 할 몫을 만들어주면 예쁘고 기특한데. 그저 투박한 도자기 작품 하나에도 이런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이리저리 휴대폰 방향을 바꾸어 가며 사진을 찍는 나예는 즐거워 보였다.


“있잖아, 나예야.”

“응?”

“그 접시 예쁘지?”

“어, 손맛이 있어. 이 가게 시그니처인가 봐.”

“그거 만든 사람, 방금 그 바리스타 언니다? 엄마랑 같이 요 옆 공방에서 도자기 배워.”

“진짜?”


나예의 눈이 일시에 커지더니 함박웃음이 퍼졌다. 세상에 남에게 무해하게 기뻐할 일이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불시에 들게 하는 웃음이었다. 와, 그렇구나. 어쩐지 좀 다르더라, 같은 찬사를 늘어놓는 딸을 보며 김은지는 조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실 엄마도 만든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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