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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26. 2024

평범한 대화조차 위로가 되는 순간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2)

이로미가 푸스스 웃었다. 그제야 윤소은은 마치 자신이 이진우와 같이 문병객을 맞은 환자 내지는 그의 보호자처럼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자신도 아침에 응급실로 달려온 당사자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게요. 엄마 심정인가.” 

“엄마라기보다는 누나 아니에요?”


그 말에 조금 크게 웃었던지, 때마침 지나치던 눈매가 뾰족한 간호사 하나가 다가와 그들을 훑어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응급실 환자분 가족이세요?”

“…가족은 아닌데요, 좀 전에 들어가신 환자분 보호자가 걱정되어서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가 황망하게 눈을 굴리는데 온갖 종류의 인간군상을 겪어본 이로미가 비교적 빠르게 대처했다. 간호사가 짧게 혀를 찼다.


“보호자분 들어가셨으면 여기서 기다리시는 것보다는,” 

“진우 씨!”


제대로 눈총을 맞기 직전, 응급실에서 나오는 이진우를 발견한 이로미가 그를 향해 열렬하게 손을 휘저었다.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 간호사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일행을 대신해서 윤소은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곧 나갈게요.” 


윤소은이 그렇게 사과한 시점에, 이미 이진우는 이로미에게 붙들려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는 게 아주 약간의 문제라면 문제이긴 했지만. 


“할머님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다면 할머니 곁을 떠났을 리가 없겠지, 하는 계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핼쑥해진 낯에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이진우가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수업도 못 왔었구나. 그렇죠?”

“죄송합니다, 연락도 미리 못 드리고…”

“그런 걸로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지만 선생님께서 수업 준비하셨는데 참석을 못해서…”

“괜찮아요! 선생님 그런 걸로 뭐라 하실 분 아니라는 거 알잖아. 본인 걱정부터 해, 진짜!”


무엇 때문에 성질이 났는지 이로미가 냅다 이진우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잠시만, 로미 씨. 진정하고. 진우 씨, 할머님이 무슨 지병이 있으세요?”

“너무 연로하셔서 그렇…대요. 쉬셔야 하는데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깨문 이진우의 표정에서 선명하게 읽히는 후회에 누구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나무라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이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그렇게라도 자학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하는 마음이 드러나서. 불편한 침묵이 드리워졌다.


“퇴원하셔도 된대요? 아님 입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윤소은이 차분하게 물었다. 


“탈진하신 것뿐이니까 상태 좀 봐서 괜찮아지시면 가도 된다고는 하는데…”


이진우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들 중에서는 이진우가 가장 어렸으므로,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어린 청년. 연로한 노인에게는 돌봄이 필요하지만 과연 그걸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을까. 난처함이 어색해진 공기를 한층 바짝 달구었다.


“아침 식사 못했죠?” 


윤소은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볍게 물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꾸벅거리긴 했어도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윤소은은 이진우가 입을 여는 찰나 얼어버렸다.


“근데 교수님은 응급실에 무슨 일이세요…?”


윤소은은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계속 이진우와 그의 유일한 보호자인 동시에 피보호자인 조모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이진우를 여기서 맞닥뜨린 일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대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약봉투가 담긴 가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꺼끌해졌다.


“아, 두통이 좀 심해서…”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 앞에서 굳이 대단찮은 접촉사고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기에 윤소은은 적당히 둘러댔다. 두통 정도로 아침부터 응급실에 달려오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쌓인 시간의 부피가 있었기에 누구도 섣부르게 넘겨짚지는 않았다. 침묵 사이로 급히 도착한 응급 차량의 사이렌 소리와 고통이 침식한 소음이 넘실거렸다.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들어드릴게요. 불현듯 그런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리번거리던 윤소은의 손에서 힘이 차츰 빠져나갈 때쯤 최현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우 씨, 그러면 이번 주도 나오기는 쉽지 않겠어요. 그렇죠?”


안 그래도 축 처져 있던 어깨가 더 늘어졌다. 이진우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얼른 입술을 깨물고 이로미의 눈치를 살폈다.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눈치챈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꼭 그 시간에 나오지 않으면 못 듣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할머니 많이 회복하신 뒤에 나와서 천천히 보강해도 되고요. 사실 진우 씨는 워낙 잘해서 중간 수업 조금 빼먹는다고 못 따라갈 것도 아니거든요.” 


그 말의 어디가 그렇게 힘이 났는지는 몰라도 어린 청년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질근질근 물고 있던 이진우가 갑자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제법 결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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