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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16. 2024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괜찮아요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8)

“진우 씨, 이젠 주스든 커피든 뭐라도 한 잔 할래요?”

“예?”

“할머님 안 계신 데서 조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가도 배웅 갔다 오나 보다, 하실 거 아니에요.” 


윤소은이 웃으며 제안했다. 멈칫하던 이진우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더니 지하에 편의점이 있긴 한데요, 하고 대답했다.


“편의점 좋네요...”


조그만 생수병을 돌려 딴 윤소은이 정작 물을 마실 생각은 않고 애꿎은 병뚜껑만 좌로 돌렸다 우로 돌리기를 계속했다. 처음부터 윤소은이 그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짐작했던 최현욱은 잠자코 기다렸다. 


“교수님, 근데 왜…”

“진우 씨 할머님 되게 품위 있게 말씀하셔서 놀랐어요.” 


아마도 제게 무슨 할 말이 있겠거니 지레짐작했던 이진우가 깜짝 놀란 토끼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굉장히 고상하셔서요. 별뜻은 아니고.”

“아. 그거…”


갑자기 수긍하는 표정이 된 그가 손안에 든 주스팩을 만지작거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할머니가 원래 되게…어…부잣집 외동딸이셨대요. 근데, 형편이 좀 안 좋아져 가지고.”

“그러셨구나…”

“할아버지랑 결혼하시고 나서도 좀 힘들게 사셨는데… 뭐 아무튼… 저희 부모님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혼자 저 떠맡으셨거든요.”


가볍게 운을 띄우느라 한 말에 이진우가 가정사를 줄줄 풀어놓자 윤소은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진우는 마치 언젠가 한 번쯤은 속시원히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할머니한테는 할머니 인생이 없었을 거예요. 좀 느긋하게 살아도 되겠다 싶을 때 제가 짐이 됐으니까요. 할머니는 계속 희생만 했는데. 근데…”


열을 띠어가던 음성이 뚝 멎었다. 여전히 소년 같은 그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가운데 앉은 이진우의 수그린 고개 위로 윤소은과 최현욱의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먹먹해진,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해진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사실 제가 이러면 안 됐어요. 열심히 부지런히 모아서 할머니도 좀 쉬시게 해 드리고, 저도 제대로 된 일자리 잡아서 고정적인 수입 만들 생각 하고… 그랬어야 되는데.”

“진우 씨.”

“다 제 욕심이에요. 진짜로 제가 제 생각만 하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할머니가 병나신 것 같고…”

“진우 씨!”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순간 큰 소리를 내뱉은 윤소은이 이진우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최현욱이 윤소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라는 의미일 터였다. 윤소은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소은의 그런 과격한 모습을 처음 본 놀랐는지 어느새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문 이진우가 시선을 가만히 고정해 왔다.


“그런 생각하지 마요. 절대요.”

“하지만 제 욕심 맞아요.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

“마음은 이해하는데요, 진우 씨.” 


최현욱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이진우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윤소은과 최현욱을 갈마보며 흔들렸다.


“네.”

“이런 일이 있으면 누구나 어디에라도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해요. 당연한 거예요. 지금 진우 씨도 그런 거고.”

“......”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일들이 있는데 사람이란 건 참 희한해서, 어디서든 원인과 결과를 그럴듯하게 끼워 맞추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하거든요. 그게 설령 가까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결과가 되건, 심하게 자책해서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건… 그렇게라도 이유를 만들어야만 이성이 제 할 일을 할 수 있대요. 마음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 돌이키며 자책하는 이진우의 모습이 순간 처음 암을 확진받았을 때의 제 모습과 어딘가 겹쳐 보여서 마음이 울컥 넘치는 바람에 제 할 말을 못 했던 윤소은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주 당연해요. 하지만 그게 항상 맞는 건 아니죠.”


입을 다물고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다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이런 일을 두고 자신을 전혀 책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최현욱과 윤소은이 동시에 생각했다. 최현욱이 힘 있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가 봐도 관련성이 있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그냥 죄책감이에요. 진짜 원인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자꾸 본인 탓 하는 건 그만둡시다. 알겠죠?”

“있잖아요.”


조금 가라앉은 소리로 윤소은이 입을 열었다. 


“이런 말, 내가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진우 씨.”

“네, 교수님.”

“진우 씨가 관심 있는 일,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 상황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느닷없는 소리에 이진우가 뭔가를 되묻고 싶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무슨 말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안 된다고 해도요, 진우 씨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관심 가는 게 있으면 그걸 마음에서 놓지 말아요.”

“잘, 이해가…”

“그 힘든 상황에서도 뭔가 해보고 싶어서 도전한다는 거, 어렵게 시간을 내는 거… 그렇게라도 뭔가를 하고 싶은 게 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어요. 살고 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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