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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20. 2024

본질은 찰나에 드러나기도 해서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9)

최현욱은 찰나 윤소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난다고 느꼈다. 하지만 조금 뒤 고개를 들어 확답을 요구하듯 이진우를 똑바로 쳐다보는 윤소은의 얼굴은 그보다 더할 수 없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 


“이번 주도 못 오나 보다.”


비어있는 빈자리를 보며 이로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잣말을 했다. 초벌구이가 끝난 기물에 색을 입히던 윤소은이 조용히 이로미가 보고 있던 빈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문득 궁금했다. 단순히 손재주가 좋다는 말로 칭찬하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감각이 있어 보였던 그 아이가, 빠졌던 수업 내내 함께 했다면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을지 알고 싶었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인 사람으로서의 본능을 넘어서는 호기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누군가의 다음이 궁금하고 기대되는 감정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좀 더 살아본 사람의 조언이랍시고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그건 누구보다 자신에게 거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놓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다면 그걸 꼭 품고 가져가요. 그녀는 속으로 한번 더 되뇌었다. 이번엔 자신에게. 나는, 나는…그러니까 나는. 


“엇!” 


깜짝 놀라서 지르는 소리에 덩달아 놀란 윤소은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수업 시작 전이면 항상 열려 있는 공방의 출입문 쪽으로, 지금껏 그녀를 상념에 들게 했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진우 씨?”


어리숙한 평소 모습 그대로였지만 조금 단단해진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가 냅다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교수님.”


“요 앞에서 만났어요. 도대체 왠지 못 들어가고 어정거리고 있더라고요.” 


김은지가 웃음기 어린 소리로 덧붙였다. 


“도대체 왜? 갑자기 낯가림해요?”

“아뇨, 그게 아니라, 두 번을 연달아 쉬고 나니까 다시 들어가기가 좀… 쉽지 않아서… 요?”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지 아닌지 불안했던지 말꼬리가 흐렸다.


“무슨 말이야, 대체! 얼른 들어가요.”


떠밀리듯이 들어간 이진우가 머뭇거리며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구경했다. 가방을 내려놓은 김은지가 공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선생님은 어디 가셨나 봐요?”

“재료 가지러 창고 가신다고 했어요. 시간 좀 걸릴 거라고 하시던데요.”


윤소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진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창고가 어디길래요? 많이 먼가…”

“바로 이 건물 옆인데. 저 문 바깥쪽이에요. 왜요? 급히 할 말이라도?”

“아뇨. 그냥 도와드릴까 싶어서요.”


누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이진우는 휙하니 일어서서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와, 행동력.” 


이로미가 짧게 감탄했다. 


“... 괜찮지 않아요?”

“네? 뭐가요? 사람이?”


콧등에 주름을 잡은 채 이진우가 나간 방향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윤소은이 순간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재료 창고, 바깥쪽에 있잖아요.”

“음…그렇… 죠?”


여전히 윤소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 김은지와 이로미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윤소은은 어딘가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냥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진우 씨가 원체 싹싹해서 솔선수범해서 일도 잘 돕는 게 보기 좋다,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갑자기요.” 


불현듯 윤소은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이로미가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교수님은 그런 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윤소은이 이로미를 돌아보며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생글생글 웃는 대답이 금세 돌아왔다.


“그런 거 있잖아요, 누가 뭘 잘하는지,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을 하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파악하는 거요. 눈썰미가 좋다고 하잖아요.”

“그래 보여요?”

“네.”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를 번갈아 테이블을 두드리던 이로미가 금세 생기발랄한 투로 덧붙였다.


“사람이란 게 원래 단편적인 것만 보고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외려 단편적인 모습 몇 개로 그 사람의 본질에 가까운 성격이 확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대단한 통찰력인데요?”

“아뇨, 아뇨. 그런 것까진 아닌데… 그냥 사소한 순간에 뭔가 확 느낌 같은 게 올 때가 있긴 있어요.”

“정말요? 저는 어떤데요?”


이로미의 말에 갑자기 흥미를 느낀 것처럼 김은지가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리던 이로미가 헤헤 웃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거, 어쩐지 무슨 관상집 연 기분인데요.”

“심각하게 생각 안 할게요. 그냥 궁금해서, 제가 남들한테 어떤 인상인지 궁금해서요…”

“그럼 진짜 그냥 재미로만 들으셔야 돼요?”


무엇을 걱정하는지 드물게 쭈뼛거리며 이로미는 김은지에게 두 번 세 번 거듭 다짐을 받아냈다. 그럼요, 걱정 마요, 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비로소 이로미가 입을 열었다.


“은지 선생님, 남이 무슨 부탁할 때 거절해 보신 적 없으시죠?”


심상한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순간 김은지가 보인 반응에 말을 꺼낸 이로미도, 곁에서 지켜보던 윤소은도 할 말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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