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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23. 2024

장래희망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10)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꽉 메우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금 같은 눈물이 정적에 실금을 낼 때까지는 그랬다.


“어…”


하늘에서 망설이던 빗방울이 처음 떨어질 때처럼 간격을 두고 투둑 떨어지던 눈물이 삽시간에 왈칵 쏟아졌다. 당황한 이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짐을 나눠 들고 잡담을 나누며 공방으로 돌아왔던 두 사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난처해하는 이진우와 최현욱의 헤매는 시선을 본 윤소은이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세워 보였다. 이내 난처해하던 이로미에게 가 닿은 눈길은 괜찮다고 말하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갑작스레 눈물을 쏟은 김은지의 어깨에 조심스러운 손이 얹혔다. 이래도 괜찮을까, 저어하면서도 사람의 손길이 주는 위안을 분명히 알고 있는 손길의 토닥임에 김은지의 어깨가 조금 더 격하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닥도닥 두드리던 윤소은이 손이 조금 뒤엔 약간의 힘을 실어 스르륵 쓸어내렸다. 최현욱은 말이 없었고 이진우와 이로미는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듯했다.


“죄송...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흐느낌이 잦아들며 조금 부끄러워진 김은지가 맹맹해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비로소 어깨와 손목에서 조금 힘을 뺀 윤소은이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감정이 복받치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럴 땐 밖으로 흘려보내는 게 좋더라고요. 속으로 쌓아두면 썩어요. 잘하셨어요.”

“... 그게, 제가… 저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나서.”

“그럴 수 있죠.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솔직해지는 게 쉽잖아요. 너무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선 속내를 말하기 어렵죠. 나중에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도 되고.”

“맞아요...”


점점 가늘어지긴 했어도 계속 흐르는 눈물을 콕콕 찍어내던 김은지가 수긍했다. 윤소은은 그저 계속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이로미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런 윤소은을 빤히 쳐다봤으나 공연히 캐묻는 결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일로 속상하신 적 많았나 봐요.”


윤소은이 가볍게 물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김은지가, 지금껏 차마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견뎌냈던 폭력의 경험들을 토로했다. 그저 대민서비스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상처의 적나라함이 듣는 누군가에게  혹여라도 전이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어째서 이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있을까. 상담사에게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인데.

듣고 있던 최현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들, 생각보다 많아요. 자신도 약자로서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해봐서 그럴 때의 심정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자기보다 더 사회적으로 약자의 포지션에 놓인 사람에게 분풀이하듯 그러는 경우가 흔하죠.”

“악순환이네요...”


이진우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꽁꽁 묻어두었던 자신의 상처를 지금 막 꺼내놓은 김은지보다도 훨씬 더 아파 보이는 얼굴에 이로미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인상을 썼다.


“아우, 진우 씨. 세상에 그런 사람 되게 많아요. 진우 씨가 아직 어려서 그래. 자기만의 처방전이 필요해, 그래서.”

“네?”


윤소은이 제 앞에 놓인 기물을 톡톡 건드리다 말고 끼어들었다.


“심리적인 처방전 말하는 거죠? 짜증 날 땐 뭐 하면 좋고, 기분 가라앉을 땐 뭐 하면 도움 되고,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자기 치료제.”

“그죠, 그거요. 너무 슬플 때, 완전 의욕 상실일 때, 세상이 혐오스러울 때, 뭐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그렇게 매몰되는 건 또 싫을 때, 기분을 전환하는 방법 같은 거 말이에요.”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면 늘 그랬듯 이로미가 경쾌하게 재잘거렸다. 눈 주위가 불그스름하게 부어오른 김은지가 동조했다.


“맞아요, 그런 거 정말 필요해요. 근데 로미 씨도 그럴 때가 있어요?”

“당연하죠! 저도 보통 사람이에요, 은지쌤!”


자못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테이블을 양손으로 쾅 내리치는 이로미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여전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김은지마저 웃을 정도로.


“아니, 진짜라니까요? 저는 그럴 때 제가 커피 배울 때 커핑하면서 써 두었던 시음 노트나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거, 이루고 싶었던 걸 잔뜩 써 둔 인생 목표 노트 같은 거 보면서 재충전한다니까요.”

“우와, 누나 진짜 대단하시네요...”

“그러게요. 인생 목표라니...”


김은지가 감탄과 의구심이 반반 뒤섞인 얼굴로 뇌까렸다. 이로미가 다소 복잡한 얼굴을 했다.


“아뇨, 그게. 왜들 그러세요... 인생 목표는 계속 세우고 조절하고 그러는 거죠. 우리 인생 길잖아요. 롱런해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목표지점을 만들어 두고 수정하고 보강하고 그러는 게... 맞지 않아요?”

“맞아요. 맞는데, 실제로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대단한 거지.”


최현욱이 얼른 끼어들었다. 이로미가 분개한 어조로 외쳤다.


“왜! 도대체 왜! 서른, 마흔이 넘으면 계획도 없이 인생 되는대로 살아도 된다고들 생각하는 거죠?”

“… 너무 맞는 말이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윤소은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을 받았고 이내 최현욱이 따라 웃었다. 비장하게 주먹까지 말아쥔 이로미가 느닷없이 외쳤다.


“나이 오십이 넘어도 장래희망은 존속할 수 있는 거라고요! 망할 세상, 중장년에게도 장래희망을 허하라! 존치하라!”


순간 정적이 맴도는가 싶더니, 엄청난 웃음소리가 공방을 가득 메웠다. 웃는 모습들은 다양했다. 이로미 바로 옆에 앉은 이진우는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가장 어린 자신이 여기서 웃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으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붙잡지 못하는 기색이었고, 울다 만 김은지는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을 휴지로 찍어내며 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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