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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02. 2024

턱시도 냥이가 가장이 된 사연에 관하여

보린,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꽃님이 안녕!


있지...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세웠던 나름의 원칙 같은 게 있었거든?  대단한 건 아닌데, 어디에 나오는 어떤 인물을 호명하든 무조건 경어로 쓰자는 거였어. 그런데 요번이 몇 번째인지 잘 기억나진 않는데, 결국 원칙이고 나발이고가 되어버렸네. 어떻게 해도 너한테는 경어가 안 나온다, 꽃님아.

거꾸로 뒤집은 갈매기가 코 밑에 멋지게 자리 잡은, 배만 하얗고 새카만 털옷을 멋지게 입은 턱시도 고양이. 중후한 몸매에 '뚱보 배트맨' 같은 위엄까지 갖추고 시대에 역행한 말투를 쓰는 거만하고 근엄한 '꽃님'아.  


영물 중에서도  영물이라, 다른 영물들도 어르신이라며 우러러보며 대접하는 우리 꽃님이. 그냥 이렇게 말할게. 나는 영물도 아니고 하찮은 인간이라 나도 꽃님 어르신, 하고 불러볼까 했는데 두드러기 올라올 것 같아서 못하겠더라, 얘.


이천모년 모월 모일,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가장 심병호 씨가 선언했더랬지.


"난 이제 가장 노릇 그만하고 싶어."
(...)
"딸, 네가 가장 좀 하면 안 될까?"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1. 여우양복점, 9쪽


"꽃님아아."
(...)
"이제부터 네가 우리 집 가장 해. 알았지?"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1. 여우양복점, 13쪽


이런 해괴망측한 떠넘기기를 통해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됐는데 세상에 우리 꽃님이는 듬직하기도 하지.


"좋소이다."
아빠랑 나는 놀라 돌아보다 그대로 굳었다. 꽃님이가, 그래 우리 집 고양이 꽃님이, 걔가 말을 한 것이다.
"이 몸이 한번 해 보겠소이다."
꽃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병호 씨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파리라도 잡듯 앞발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뻣뻣하게 굳은 아빠 손에서 담배를 튕겨 내 자기 입에 척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는 꽃님이가 가장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1. 여우양복점, 14쪽


메리와 병호 씨는 설마 하니 꽃님이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겠냐 싶었겠지만 장하게도 너는 당장 돈 벌 궁리를 해서 그 조그만 지하방에 월세를 놓았지. 그리고 넌 당당하게 이런 말도 하더라?


"가장 대우가 엉망이외다. 이래서야 돈 벌어 올 맛이 나겠소이까?"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1. 여우양복점,  18쪽


우리 집 아저씨가 이런 소릴 하면 당장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봐줬을 텐데, 꽃님이는 귀여워서 봐줄게.


그 가장 노릇이 생각보다 못해먹을 짓이지? 자기는 이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가장 니가 하라고 미뤄놓는 아저씨나 천방지축 초등학생 딸 콤비가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니고 그거 뒷수습하러 다니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힘들었을 거야... 내가 다 안다, 꽃님이 맘이 어땠을지... 진짜 왜, 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뭘 하지 말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하지 말라는 건데 왜 기어코 대형사고를 쳐놓고는, 그 뒷감당을 다 떠넘기는 걸까. 꽃님이 가장 때려치우고 가출하고 싶었지? 내가 그 맘 다 안다... 진짜 알아.


"돈만 벌어 오면 될 줄 알았는데...... 가장 노릇이란 게 생각보다 성가신 일이외다."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1. 여우양복점, 64쪽


그러게나 말야.


"호호 씨 때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 되오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마시오. 병호 씨한테도! 약속할 수 있겠소이까?"
"약속할게."
자동차 이야기는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 고양이 가장의 기묘한 돈벌이 2. 황천택배 헬택배 36쪽


아... 내가 다 대리두통이 일어... 근데 꽃님아, 너는 어떻게 그리 인내심도 기니. 나 같았음 이놈의 집구석, 구제불능이다. 못해먹겠다, 하고 걷어치우고 나왔을걸. 사람이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지, 그건 나도 동의해. 그래도 어떻게 두 번 세 번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대니. 몰래 어디 들어가지 마라, 아는 척하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왜 또 그놈의 호기심을 못 이겨먹어서 번번이 그 사달을 낸대니... 나 같았음 네 몸 꼭대기에 붙어있는 그건 대체 용도가 뭐냐고 난리난리를 쳤을 것 같은데 너는 참 잘도 참더라. 정말이지 내가 눈물반신욕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사실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와 병호 씨, 심지어 늘어나버린 군식구 까마귀 모자까지 거둔 속내를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아. 그럴 때 참 좋더라. 너를 실제로 쓰다듬어 볼 일도 없겠지만(그랬다간 왠지 '만지지 마시오' 하고 꼬리로 손등을 탁 쳐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속에만 존재하는 너랑 시선을 맞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말야. 아마 그래서 나는 읽고 또 읽는 것 같아. 그런 사람- 물론 고양이여도 좋지만 -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나하고 어딘가에서 통했던 친구, 하고 끄적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그나저나 꽃님이가 드디어 가장 노릇을 때려치우기로 했다니 정말로 기쁘다! 이젠 정말 평범한 집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느긋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병호 씨한테 말 전할게, 이젠 꽃님이 고생 좀 시키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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