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마틸다
“예민하고 총명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좋은 아이” -10쪽
인 마틸다를 가장 먼저 알아보셨던 눈 밝으신 펠프스 사서 선생님, 안녕하세요.
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마틸다는 전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진 아이랍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그럼에도 마틸다의 비범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바로 선생님이세요. 저도 사서 선생님들을 퍽 많이 겪어봤지만 선생님처럼 다정다감한 분은 그리 많이 만나보진 못했거든요.
뭐 어쨌든요. 어린이 책을 찾는 마틸다에게 좋은 그림책을 골라주겠노라 선뜻 제안하셨을 때 마틸다가 직접 해보겠노라 거절했잖아요? 그건 좀 아쉬웠어요. 제가 그림책을 좋아해서 그래요.
선생님이 고르신 그림책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게다가 마틸다가 도서관에 있는 어린이 책을 전부 다 읽었다고 하는데, 그 도서관에 갖추어 두신 어린이 책들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도 궁금하단 말이죠. 케네스 그레이엄이나 C.S 루이스, A.A 밀른의 책은 틀림없이 있었겠죠?
“어떤 책은 아주 형편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떤 책은 재미있었어요. 그중에서 ‘비밀의 화원’이 제일 좋았어요. 신비로움으로 가득했어요. 그 닫혀진 문 뒤에 있는 방의 비밀과 큰 벽 뒤에 있는 화원의 비밀 말예요.” -13쪽
이렇게 당차게 제가 읽은 책에 대해 소감을 말할 수 있는 어린이라니 너무 귀엽잖아요. 마틸다야 예외겠지만, 대개의 어린이들이란 아주 한정적인 어휘로 소통하게 마련이고 머릿속에 가지고 다닐 게 틀림없는 그 조그만 단어 주머니를 낑낑 뒤지며 제 마음에 맞춤한 말을 찾아내기 위해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귀엽잖아요. 선생님도 혹시 그런 모습들이 귀하고 예뻐서 어린이 열람실에서 사서를 하고 계신 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한때 저도 그 비슷한 걸 했었거든요. 정식으로는 아니지만, 아무튼 아이들에게 고심해서 책을 골라주고 다 읽은 아이의 반응을 두근두근 뛰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때가 있었어요. 이런 감상을 들고 와서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은 너무나 귀하고 어여쁘니까요.
대체로 이런 아이들을 많이 봤을 선생님이,
“저는 어른들이 읽는 훌륭한 책을 읽고 싶어요. 유명한 걸로요. 하지만 제목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13쪽
이라는 네 살 하고도 삼 개월이 된 여자아이의 부탁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그 애는 마틸다니까요. 특별하고 또 특별한 아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의 아이들은 다 자기 나름으로 특별하더라고요, 그렇잖은가요? 선생님은 분명히 제 말에 동의하실 거예요. 제각각 다른 개성을 빛내는 아이들을 수없이 보셨을 테니까요.
마틸다가 추천을 부탁한 책은 다시 말해 고전이죠. 하지만 마틸다는 역시 네 살이고, 네 살의 표현 범위란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게 고전을 추천해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음은 누구나 알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은,
“이걸 읽어 보렴. 이건 대단히 유명하고 훌륭한 소설이란다. 만약 이 소설이 지루하면, 내게 알려 주렴. 그럼 내가 좀 더 짧고 쉬운 것으로 찾아줄 테니까.” -14쪽
라고 말씀하셨죠.
훌륭한 이야기란 뭘까요, 펠프스 선생님? 누구나 제가끔의 좋은 책에 대한 정의를 갖고 있겠죠.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독자가 몇 살이건, 언제 다시 읽건 매번 새롭게 달리 읽히는 이야기라고. 예전에 미처 보지 못하고 놓쳤던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라고. 사실 마틸다의 이야기도, 제겐 그래요. 그건 다음 기회에 할 이야기겠지만서도요.
“헤밍웨이는 제가 이해 못 하는 많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어요. 특히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요. 그래도 전 헤밍웨이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헤밍웨이가 이야기를 쓰는 방식은 제가 꼭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서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요.” -18쪽
선생님은 이 조그만 여자아이의 지성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게 크나큰 기쁨이었겠죠. 제가 마틸다를 처음 알았을 때엔 선생님의 마음 같은 것을 보기엔 좀 어렸는데, 지금은 잘 알거든요. 이 아이의 인생에 내가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 주겠다던가, 여하간 뭔가 그런 거창한 생각으로 책을 골라주기 시작하신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저 작은 호기심과 기쁨으로 시작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인생으로 걸어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대단한 일이기도 하죠. 선생님이 처음 이 아이에게 권해주었던 책과 그 목록들로 인해 마틸다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았고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던 삶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책이란 게 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요.
그래서 마틸다는 선생님 다음으로 제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하니 선생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모르셨겠지만요.
“저는 다른 책을 읽고 있어요. 그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요. 펠프스 아줌마는 무척 친절하세요. 제가 책을 고르는 걸 도와 주세요.”
“다른 어떤 책 말이니?”
“저는 찰스 디킨스를 좋아해요.” -83쪽
그러니까 마틸다에게 선생님은 찰스 디킨스와, 풍자와 해학, 인류애를 가르쳐 준 분인 거죠.
한 사람에게 한두 가지 정도의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에 대해 꼭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마틸다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니 선생님은 알지만, 의외로 펠프스 선생님은 잘 모르거든요.
오늘도 어딘가에서 책을 고르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펠프스 선생님, 마틸다에게 선뜻 ‘유명하고 훌륭한데 재미있기까지 한 책’을 골라주셔서 고마워요. 결코 쉽지 않은 그 요구에 바로 이런 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선생님의 내공에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