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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11. 2024

네게도 내게도 있는 것, 상처

6. 나선 계단을 오르며(12)

“정말요…”


가장 먼저 수긍한 건 김은지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신기한 모양인지 이쪽저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요모조모 자세히 뜯어보느라 바빠 보였다. 윤소은이 거들었다.


“학생들 작품 모아놓고 평가할 때 하고 비슷해요.”

“아무래도요? 교수님은 그럴 때 어떤 기분이세요?”

“평소에도 조용해서 자기표현을 잘 안 하는 학생들은 제가 아주 자세히 기억 못 하지만…”


그 말에 김은지가 미간을 잔뜩 모으고 윤소은의 말에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도 반응이 큰 애들은 기억이 나니까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애들이 작품 해 온 거 보면 이름 안 봐도 어떤 게 누구 건지 대강 다 보인단 말이죠. 누가 뭘 만들었건 거기서 그 사람이 읽힌다는 게 흥미로워요. 정말로요.”

“저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가르쳐본 게 처음이어서, 교수님만큼 경험이 풍부하진 않지만요.”


최현욱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언의 허락을 구하듯 그를 둘러싼 이들을 돌아보았다. 윤소은과 김은지는 그냥 말을 하면 될 일이지 않은가 하는 기색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로미와 이진우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건 그를 뱅 둘러싼 시선들 속에서 암묵적인 동의를 읽어낸 최현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오래 있었던 분야만 해도 확실히 그렇거든요. 같은 악상 기호가 쓰여진 악보를 똑같이 보고 연주하는데 사람마다 다 달라요. 놀라울 정도로. 그런데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모두가 같은 걸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달리 표현하기 때문에 그 많은 연주가 존재하는 거잖아요.”

“음…네.”

“이것도 그렇죠. 그저 한번 부둥켜안은 게 다인데, 보세요.”


달항아리 같은 형태의 비슷비슷한 모양새를 갖고 있던 도자기들은 간 곳이 없었다. 한쪽 어깨가 푹 꺼져 들고 항아리 입구가 우그러들었다. 가운데가 잘록해지기도 했고 걸치고 있던 옷의 직물무늬가 그대로 전사된 것도 있었다. 팔이 지나간 것이 분명한 자리 위에 뺨까지 닿았던 흔적마저 남은 도자기를 본 이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거 로미 누나 거다. 맞죠?”

“그러게요, 나도 보니까 딱 알겠어요!”


김은지가 신난 듯 맞장구를 쳤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힘껏 끌어안은 흔적이 남은 기물은 평소 이로미의 성격 그대로를 떠낸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씁, 하고 입맛을 다신 이로미가 말했다.


“저것만 있으면 좀… 뭔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다 어디 하나씩 흐트러진 걸 한꺼번에 모아놓으니까 컨셉 같아요. 작품 전시회 같기도 하고.”

“그렇죠?”

“네…”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갑자기 쥐 죽은 듯 실내가 고요해졌다. 침묵이 깔렸는데도 부산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최현욱은 가만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시작하기만 하면 물꼬는 자연스레 터질 것이기에. 역시나 떠넘기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하는 이로미가 포문을 열었다.


“전 그냥 악수하는 기분이었어요. 악수는 아닌가…? 암튼 꼭 사람한테 인사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요?”

“그러니까… 극 E인 저 말고 I스러운 로미가 뚜하니 입 내밀고 앉아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거든요, 갑자기?”

“오, 신선한 발상인데요.”

“암튼요. 그래서 반갑다, 야! 이런 느낌이었다가,”


이로미가 슬며시 좌중을 둘러보더니 명랑하게 말했다.


“으유, 니가 고생이 많다. 그래도 뭐 어쩌겠냐, 그런 기분이 왈칵 몰려와서.”

“아하.”


최현욱이 흥미진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하고 채근하는 목소리에 이로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고, 앞으로도 쭈욱 수고해라? 그런 기분으로 덥석 안아본 거예요. 그게 전부.”

“그랬구나. 소감 고마워요. 또 얘기해 주실 분?”


콧잔등을 매만지던 윤소은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네, 교수님?”

“사실 전,”


무슨 말을 하든 지금껏 그다지 망설이는 모습을 내비친 적 없던 윤소은이 드물게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일부러 피하는 것인지 시선은 물레 위의 기물들을 번갈아 오갔다.


“좀 아팠거든요. 치료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고… 원래 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어요. 그 시간들을 한꺼번에 안아주는 기분이었어요. 여기서 꽉 매듭짓고, 이제 또 한걸음 가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로미 씨 말처럼, 저도 앞으로 쭉 수고하면서 잘 살고 싶기도 하고.”

“많이 아프셨어요?”


김은지의 사람 좋은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잔뜩 스몄다. 윤소은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그럴 때도 있었고 그냥저냥 견딜 만할 때도 있었어요. 평균을 낸다는 말이 우습긴 하지만 그래서 어쨌든 버틴 것 같아요. 너무 아픈 날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날도 있었으니까요.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오르락내리락하다가…버텨진 건지도 모르겠네요. 계속 아프기만 했으면 정말 못 견뎠을 것 같은데.”

“교수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감정의 진폭이 큰 편인 김은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말하다 쓱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힘든 일 겪으신 분은 의연하신데 제가 괜히.”

“선생님도 힘드셨잖아요.”


윤소은이 따뜻하게 김은지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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