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선 계단을 오르며(11)
“긴장 푸시고요.”
마치 윤소은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것처럼 최현욱이 말을 건네왔다. 윤소은이 여전히 말이 없자 그가 팔을 벌려 허공을 부둥켜안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냥, 안아주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안아주고 싶었던 때의 자신을 떠올리셔도 좋고요.”
최현욱이 지침삼아 하는 말을 듣던 윤소은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윤소은의 표정이 그토록 흔들리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돌풍이 불어닥친 자리처럼 그녀의 얼굴이 심하게 이지러졌다. 조금 있다 다시 해보시라고 말해야 하나, 최현욱이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손을 뻗은 윤소은이 덥석 흙덩어리를 끌어안았다. 그 짧은 찰나를, 그곳에 있던 이들 모두가 천천히 흐르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지켜보았다. 설움 같기도 하고 회한 같기도 한 감정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숨소리와 그녀의 둥근 등허리가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즈넉한 그 공간에서, 윤소은만이 쉼없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눈물일까. 언뜻 윤소은의 눈에서 흔들리는 무엇을 본 것 같다고도 생각한 최현욱은 금세 생각을 고쳤다. 얼른 뒤로 물러선 윤소은이 활짝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떠셨어요?”
“... 왠지 좀 개운하네요.”
윤소은이 산뜻하게 말했다. 최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은지에게 눈짓했다.
“자세한 감상은 이따 함께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김은지 수강생님도 한번 해보시죠.”
앞서 시범을 보인 사람이 있어서인가, 아까처럼 영문 몰라하는 얼굴은 아니었어도 김은지는 여전히 반신반의가 뒤섞인 표정으로 물레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면서도 걱정을 덜지 못한 듯 또 질문했다.
“너무 힘줘서 완전히 우그러뜨려버리면 어떡하죠?”
“전혀 아무 문제없어요. 말씀드렸듯이 아무것도 담지 못할 정도로 입구가 오므려져도 괜찮아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내키는 대로 안아주세요. 어차피 헌 옷인데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이렇게라도 남편분 공헌하게 하신다면서요.”
장난스레 끼어든 이로미의 말에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뺀 김은지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네요. 그럼…”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던 윤소은과 달리 김은지는 퍽 과감하게 양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과감함도 잠시, 막상 머뭇머뭇하는 팔은 깊이 가닿지 못했다. 스치듯 지나친 자리에 일부러 새긴 듯한 흔적이 남았다. 동그스름했던 원래의 형태를 크게 잃지 않은 기물에 고르게 무늬처럼 팬 자국을 두른 정도의 자국이 남자 김은지는 어쩐지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예쁜 무늬가 생겼네요. 의도한 것처럼 고르게 나왔어요.”
먼저 할 일을 마쳐서인지 여유롭게 지켜보던 윤소은이 가볍게 운을 떼었다.
“그치만 은지쌤다운 걸요? 조심스럽잖아요.”
“네?”
당혹이 섞인 반문에 이로미가 뭘 그런 걸 되묻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은지쌤 그러시잖아요. 항상 다른 사람 먼저 생각하시고 배려하시고. 심지어 말도 못 하고 감정도 없는 흙조차 조심조심 다루실 정도로.”
김은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심상찮음을 느낀 이로미가 팔을 마구 내저으며 열심히 덧붙였다.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 나쁜 뜻으로 한말 아니에요. 그냥, 그 있잖아요.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원래 같은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그걸 장점으로도 보고 단점으로도 본다잖아요.”
“여기서는 다 장점이에요. 개성이고요.”
최현욱이 단정 짓듯 말했다. 그러더니 남은 이로미와 이진우에게 누가 먼저 나서겠냐고 묻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로미가 호쾌하게 소매를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누님이 먼저 간다. 불만 없지?”
“어, 네!”
최현욱이 뭐라 끼어들 새도 없이 물레를 쳐다보던 이로미가 시원스러운 동작으로 팔을 벌렸다 품 안으로 껴안았다. 힘에 밀린 상단부가 뭉치더니 한쪽이 뭉개져서 웃음을 자아냈다.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해요! 뭐지? 막… 파닥거리고 반항하는 내면의 나를 달래준달까, 그런 느낌이 좀 드는데요?”
“생각도 못한 비유인데 적절하게 들리네요.”
최현욱이 감탄한 듯 손뼉을 쳤다. 과격했던 탓인지 유달리 흙이 많이 묻은 이로미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근데 한편으론 어린애 달래듯 또 되게 살살 비위 맞춰줘야 할 것 같은데, 뭐랄까… 맘속의 응어리를 털어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렇더라고요. 신기하네.”
“짧은 시간인데 내면의 아이와 대화라도 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럴지도요. 생소한 경험인데 그래도 재밌었어요! 그럼 이제 막내 차롄가?”
제가 만들어놓은 것을 자평하며 재미있어하던 이로미가 이진우를 돌아보더니 황당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흙투성이가 된 겉옷을 슬슬 벗어내며 이진우가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쳐다보시면 괜히 긴장돼서요.”
“와, 치사해. 남들 하는 건 다 봐놓고 본인은 몰래 스리슬쩍 해버리네?”
“뭐 엄청 대단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 시선 의식을 좀 많이 하는 편이어서요…”
이로미가 치사해, 무슨 포즈로 끌어안는지 봤어야 되는데, 같은 소소한 불만을 표출하며 투덜거리는 동안 최현욱이 들뜬 듯 제각기 다른 형태로 조금씩 일그러진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차례로 한 번 쭉 봐 보세요. 거의 비슷한 크기와 형태의 기물이었고, 다들 한 번씩 끌어안기만 하신 건데도 모양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죠.”